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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인찬 칼럼] 국민연금 의결권, 꼭 행사해야 하나

지금처럼 정치가 끼어들면 어느 쪽으로 표 던져도 말썽
오로지 수익률에만 집중하길

[곽인찬 칼럼] 국민연금 의결권, 꼭 행사해야 하나

1988년부터 국민연금을 부었으니 올해로 29년째다. 연금은 2024년부터 탄다. 월급쟁이들의 유일한 희망이다. 2060년이면 바닥이 드러날 거란 얘기도 있다. 부디 국민연금공단이 돈을 잘 굴려서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오래 연금을 탈 수 있으면 좋겠다. 나 같은 장삼이사(張三李四)에겐 연금이 열 효자보다 낫다. 그런데 최근 국민연금 운용 실적이 별로라 걱정이다. 작년 수익률은 3%를 살짝 웃도는 정도다(10월 말 기준). 그 전 3년간(2013~2015년) 4~5%를 밑돈다. 세계적 저금리가 큰 원인이겠지만 좀 더 분발했으면 싶다.

난 국민연금이 주주총회에서 의결권을 어떻게 행사해야 하는지엔 관심이 없다. 찬성을 하든 반대를 하든 수익률만 높으면 장땡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국민연금이 꼭 주총에서 의결권을 앞장서서 행사할 필요가 있을까.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보라. 찬성표를 던졌다 몰매를 맞고 있지 않은가. 거꾸로 국민연금이 반대표를 던졌다면 어땠을까. 보나마나 국민연금은 도대체 어느 나라 기관투자가냐고 호된 비판을 받았을 게다. 이래도 맞고 저래도 터질 일을 왜 굳이 해야 하나.

국민연금에 고상한 역할을 주문하는 이들이 있다. 대주주로서 재벌을 견제하라는 거다. 아니, 국민 노후를 책임진 국민연금에 왜 그런 일을 맡기나. 재벌 총수가 사익(私益)을 좇아 엉뚱한 짓을 할 수 있다. 그걸 막으라고 납세자들이 공무원한테 월급을 주는 거다. 정부가 할 일을 국민연금에 떠넘겨선 안 된다. 국민연금은 오로지 "국민의 생활안정과 복지증진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국민연금법 1조). 다른 목적은 다 군더더기다.

국민연금이 함부로 의결권을 행사해선 안 될 진짜 이유가 있다. 정치가 끼어들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삼성물산 합병을 놓고 말썽이 인 것도 결국은 정치가 신성한 연금을 더럽혔기 때문이다. 국민연금법(2조)에 따르면 "국민연금사업은 보건복지부 장관이 맡아 주관한다"고 돼 있다. 정부의 간섭을 법이 보장하는 셈이다. 의결권을 마구 휘두르기 시작하면 국민연금을 통해 정권이 대기업을 통제하는 모양새가 된다.

국민연금은 국내 주식을 약 100조원어치 갖고 있다. 총 545조원에서 18%가 조금 넘는 액수다. 주로 대기업에 투자한다. 삼성전자(9.03%.1월 20일 기준), 삼성물산(5.78%)이 대표적이다. 우리 귀에 익은 대기업 계열사들은 죄다 대주주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 정치가 끼어들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단숨에 재벌을 휘어잡을 수 있다.

국민연금은 세계 3위 규모다. 워낙 큰돈이라 기금 운용을 독립시키자는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오갔다. 최고의사결정 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를 독립시키고 그 아래 기금운용공사를 두는 안도 나왔다. 그러나 국민연금을 쌈짓돈처럼 여기는 국회에서 번번이 발목을 잡혔다. 정치는 국민연금을 놓아줄 생각이 없다. 이게 문제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모두 667건의 의결권을 행사했다. 하루에 두 건꼴이다. 과부하다. 괜히 헛심 쓰지 말고 차라리 그 시간에 수익률에 집중하는 게 낫다. 주식이 맘에 들면 더 사고 맘에 안 들면 팔면 된다.
이게 시장에 더 강한 시그널을 준다. 의결권이 무슨 대수랴. 국민연금은 다른 주주들의 선택을 존중하는 중립투표(Shadow Voting)로 족하다. 여론의 관심을 끄는 캐스팅보트 역할은 정중히 사양하라. 만사 실속이 왕이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