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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사설] 김상조식 신중한 행보를 보고 배워라

삼성 등 4대 그룹과 소통 머잖아 근사한 '작품' 기대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23일 삼성.현대차.SK.LG그룹 전문경영자들을 만났다. 문재인정부 정책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기 위해서다. 김 위원장은 인사말에서 "사전규제 법률을 만들거나 행정력을 동원해 기업을 제재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대기업은 한국 경제가 이룩한 놀라운 성공의 증거이며 미래에도 소중한 자산"이라고도 했다. 그러면서도 김 위원장은 "기업인들 스스로 선제적인 변화 노력을 기울여 모범적인 사례를 만들어달라"고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선 때 문재인 후보는 재벌개혁을 핵심 공약으로 내걸었다. 재벌들은 잔뜩 긴장했다. 문 후보가 당선되자 긴장도는 더 높아졌다. 예상대로 문 대통령은 '재벌 저격수' 별명이 붙은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을 공정거래위원장으로 낙점했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김 위원장은 내내 차분했다. 취임식 날 그는 기자들에게 "4대 그룹을 찍어서 몰아치듯이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난 19일엔 대기업 경영자들과 만남을 제안했고, 23일 실제로 만났다. 중간에서 대한상의가 다리를 놨다. 소통을 중시하는 김 위원장의 신중한 행보는 문재인정부의 귀감이 될 만하다.

정부가 기업에 대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시대는 지났다. 삼성 등 대기업들은 세계를 상대로 싸운다. 정부가 뭐라 안 해도 살아남으려 스스로 발버둥친다. 참여정부에서 요직을 거친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국가자본주의식 정부 규제를 과감하게 떨쳐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기업 등 각 경제주체가 창의와 혁신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것이다('경제철학의 전환'). 김상조식 정책 기조는 이 같은 시대 요청에 부합한다.

반면 새 정부가 출범한 뒤 실적을 내려고 서두르는 모습도 일부 보인다.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주도한 이동통신 통화료 인하가 대표적이다. 미래창조과학부를 쥐어짜는 바람에 시장경제 원칙을 훼손한 안이 그대로 발표됐다. 그 과정에서 업계 의견도 무시됐다. 그에 비하면 원칙을 세워 절차를 밟아가는 김상조 위원장의 '줏대'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재계로서도 기회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 공정거래위원장으로 있을 때 지배구조 개선 같은 묵은 과제를 털어내는 게 좋다. 기업은 부자인데 소비자는 가난하다는 오랜 불만도 다독일 필요가 있다. 머잖아 김 위원장과 재계가 괜찮은 '공동작품'을 만들어내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