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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인찬 칼럼] 서민 울리면 좋은 법 아니다

취지 좋지만 민생도 해쳐
뇌물만 정밀 타격하도록 김영란법 손볼 순 없을까

[곽인찬 칼럼] 서민 울리면 좋은 법 아니다

추석 때 몇 군데서 선물을 받았다. 제일 맘 편히 받은 선물은 회사에서 준 선물이다. 치약.칫솔 같은 생활용품 세트다. 마침 집에 여분이 다 떨어졌는데 잘 됐다. 문재인 대통령이 보낸 선물도 받았다. 쌀, 잣, 참깨 같은 농산물이 정성껏 담겼다. 뭐 이런 걸 나한테까지 보내셨나 싶지만, 역시 맘 편히 받았다. 대통령이 보냈으니 김영란법에 걸릴 염려는 없지 않은가.

뜬금없이 로펌에서 배달 문의가 오기도 했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거기 잘 아는 변호사도 없는데…. 정중히 거절했다. 그랬더니 두말 않고 "알겠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나 같은 사람이 많다는 뜻이리라.

예년보다 선물이 줄었다. 기업에선 똑 끊겼다. 은행도 마찬가지다. 섭섭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김영란법이 제대로 작동하는 것 같아 기쁘다. 오랫동안 우리는 선물과 뇌물의 경계를 걸었다. 선물인 듯 선물 아닌 선물 같은 뇌물을 주고받았다. 미풍양속이란 근사한 명분으로 이를 덮었다. 잘못된 관행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비정부기구인 국제투명성기구(TI)는 해마다 국가별 부패순위를 매긴다. 작년 한국은 100점 만점에 53점을 얻어 176개국 중 52위에 올랐다. 한국 바로 위가 아프리카 르완다, 바로 아래가 역시 아프리카 나미비아다. 아프리카 나라라고 얕잡아 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다만 1인당 국내총생산(GDP) 순위에서 한국은 30위, 나미비아는 99위, 르완다는 100위권 밖이란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런데 나처럼 선물을 받는 사람과 선물을 만들어 파는 사람은 생각이 다르다. 농수축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김영란법은 생계가 달린 문제다. 나야 부패가 어쩌구저쩌구 고상한 척 폼만 잡으면 되지만 상인들은 피가 마른다.

추석 전에 국민권익위원회가 청탁금지법 시행 1년 토론회를 열었다. 이때 단상에 '난입'한 한국난재배자협회 유창호 수석부회장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한다. 권익위는 법밖에 안 보이고, 국민은 안 보이느냐"고 외쳤다. 현장에 있던 박은정 권익위원장은 30분 동안 서서 이들의 말을 들었다. 경청하는 위원장의 모습에서 해법의 실마리를 본다.

물론 법은 엄정해야 한다. 물러터진 법은 없느니만 못하다. 중국 춘추시대 때 오나라 손무는 왕(합려) 앞에서 궁녀부대를 훈련시켰다. 궁녀들이 시시덕거리며 따르지 않자 손무는 군법에 따라 왕이 총애하는 두 여인의 목을 벴다. 왕은 깜짝 놀랐고 궁녀들은 더 깜짝 놀랐다. 그때부터 궁녀부대 군기가 바싹 섰다.

하지만 법이 너무 세면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전국시대 진나라의 재상 위앙은 법을 추상같이 집행했다. 백성들끼리 서로 감시하고 고발하게 했다. 신고를 안 하면 허리가 잘리는 형벌을 받았다. 이웃끼리 싸워도 참형을 면치 못했다. 세월이 흘러 왕이 바뀌자 불만이 터져나왔다. 위앙은 쫓기는 신세가 됐다. 여관에 들어서니 주인이 신분증을 요구했다. 위앙이 없다고 하자 주인은 "너를 재웠다간 위앙의 법에 따라 나까지 죽는다"며 쫓아냈다. 결국 위앙은 군사들에게 잡혀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3.5.10만원 규정 때문에 서민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면 썩 훌륭한 법은 아니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란 말이 있다. 아무리 법 취지가 좋아도 민생을 해쳐선 곤란하다. 족집게처럼 뇌물만 정밀타격할 수 있게 김영란법을 손볼 순 없을까.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