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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전쟁 일촉즉발] '지렛대' 없는 정부, 원론만 재확인

[무역전쟁 일촉즉발] '지렛대' 없는 정부, 원론만 재확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백악관에서 철강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입장을 주지사들에게 밝히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무역전쟁 일촉즉발] '지렛대' 없는 정부, 원론만 재확인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왼쪽)과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지난달 국회에서 통상현안에 대해 답변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무역전쟁 수준의 무차별적 통상압박에 정부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트럼프 정부의 보호무역 통상압박이 따라가기에도 벅찰 정도로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지만 우리 정부가 손에 쥔 지렛대(상응하는 실효적 수단)가 별로 없다는 점에서다.

트럼프 정부는 수입산 철강에 25% 관세 일괄 부과와 보복관세(호혜세 reciprocal tax),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발동 등 대통령 권한의 가용 수단을 모두 동원해 무역전쟁을 촉발하고 있다. 철강, 반도체, 자동차 등 주요 교역국인 우리 측은 상당한 피해가 우려된다. 미국의 요구로 하는수없이 착수한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협상에 이어 한국산 세탁기·태양광모듈 세이프가드 발동, 철강 고율 관세 부과, 한국 반도체기업 기술특허 침해 조사 개시 등 미국의 일방적 조치에 우리 정부는 사실상 속수무책으로 끌려다니고 있다.

이에 정부는 5일 오후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 주재로 산업통상자원부 등 관계부처와 대외통상관계장관회의를 긴급 소집했다. 정부는 기존 기조대로 통상과 안보를 분리하며, 이익 균형 차원에서 대응하고, 아웃리치(우호세력 접촉)를 강화한다는 방침을 재확인했다. 정부의 별다른 대외 메시지 없이 기존 방침을 확인하는 정도의 발언만 공개했다.

이날 김 부총리는 "최근 대외통상 상황을 엄중히 인식하고 있다. 전 부처가 긴밀히 공조해 대외 리스크에 기민하게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미국의 철강관세 등 통상압박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로 김 부총리는 "미국 의회, 주정부, 경제단체와 접촉해 설득 노력을 강화하고 3월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회의에서 미국, 주요국과 양자회담을 통해 우리 입장을 설명할 것"이라며 아웃리치 우선 방침을 재확인했다. 강경책 중에 하나인 'WTO 제소' 방침은 밝히지 않았다.

이날 긴급 회의는 정부가 최근 심상치않게 전개되는 트럼프발 무역전쟁과 중국·유럽연합(EU) 등 주요국의 강력 대응 등 급변하는 시장 상황을 매우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뜻이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이날 회의 참석차 미국에서 지난 3일 급거 귀국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김 본부장은 지난달 25일 출국해 당초 9일까지 미국에서 행정부 및 의회 관계자를 만날 계획이었다. 이날 김 본부장은 철강관세를 놓고 찬반으로 갈라진 백악관 내부 사정 등 워싱턴 현지 분위기및 아웃리치 결과를 설명했다. 6일간의 미국 체류 중에 김 본부장은 개리 콘 미국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의장, 윌버 로스 상무장관 및 의회 주요 인사 등과 접촉했다. 콘 NEC 의장은 트럼프의 철강 관세 조치를 반대하고 있다. 김 본부장은 6일 다시 미국으로 출국, 트럼프 대통령의 철강관세에 최종 서명 직전까지 아웃리치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문제는 정부가 아웃리치 강화와 WTO 위반시 제소 방침을 밝힌 것 이외에 현재로선 별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세이프가드 조치이후 WTO 제소 방침을 밝혔던 정부가 '철강 25% 일괄 관세' 방침에는 신중모드로 전환한 것이다. 미국과 중국, EU와의 무역전쟁에 우리가 목소리를 섣불리 냈다고 휘말릴 수 있다는 점에서다. 일단 '정중동'으로 물밑 아웃리치를 하며, 최대한 실익을 보겠다는 얘기다. 트럼프의 최종 서명까지 미국 정부와 업계간 마찰, 백악관내 권력 내분 등이 표면화된 만큼 '철강관세 예외' 등 우리 측에 유리할 수 있는 일말의 여지를 보고 있는 셈이다.

김종훈 전 통상교섭본부장은 "철강 관세 문제는 (애초에) 중국의 철강공급 과잉 문제에서 촉발된 것이다. 철강관세(25%)를 부과하려는 미국을 상대해 중국 측과 같이 대응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중국산 철강제품을 우회수출하지 않았다(2016년 기준 대미 수출시 중국산 철강재 사용비율 2.4%에 불과)는 점을 설명하고 오해를 풀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단호하고 강경한 입장으로 통상압박에 대응하되 정연한 논리로 설득, (압박을) 순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앞서 미국이 한국산 세탁기 세이프가드를 발동하자 김 본부장은 "WTO 판결까지 2~3년이 걸리지만, 그래도 우리는 제소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합법적으로 보복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절차를 밟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문재인 대통령도 미국의 불합리한 보호무역 조치에 WTO 제소 검토 등 당당히 대응할 것을 주문한 바 있다.

반면, 독일과 프랑스 등 EU 회원국과 중국·캐나다·멕시코·브라질 등 주요 철강 교역국은 "보복관세를 부과하겠다"며 강경한 메시지를 내며 트럼프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하지만 '철강관세 폭탄'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이달 중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리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3차 개정협상, 세탁기 세이프가드 WTO 제소 조치, 보복관세 조치 등 미국과 얽혀 있는 현안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철강관세 25% 부과는 우리는 '최악의 조치(12개국에 관세 53% 부과)'는 피했다고 하지만, 우리 철강업계의 유정용 강관 등 수출에 타격이 불가피하다.
또 미국 시장에 관세장벽이 높아지면 EU 등 다른 시장으로 이동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EU 등도 보복관세에 나설 경우 철강 수출여건이 어려워질 수 밖에 없다.

또 FTA 3차 개정협상에선 우리가 '데드라인'으로 협상불가를 선언한 농축수산물에 대한 미국 측의 추가 개방 및 관세철폐 일정 단축 등의 압박을 구체화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고율의 관세, 보복세, 시장침해 조사, 불리한가용정보(AFA) 조사 특권 등을 지렛대로 자동차 수입개방 확대 등 우리 측에 압박수위를 높일 것이 확실시된다.

skjung@fnnews.com 정상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