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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인찬 칼럼] 평화는 거저 오지 않는다

1925년 로카르노조약으로 여럿이 노벨평화상 탔지만
유럽은 전쟁 구렁텅이 빠져

[곽인찬 칼럼] 평화는 거저 오지 않는다

영웅의 귀환이었다. 1938년 9월 30일 런던 공항에 도착한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를 환영 인파가 둘러쌌다. 체임벌린 총리는 이제 막 뮌헨협정을 맺고 귀국하는 길이었다. 덤으로 그는 독일 아돌프 히틀러 총통과 영.독 불가침 협정까지 맺었다. 체임벌린은 개선장군처럼 왕궁으로 향했다. 공항에서 왕궁까지 14㎞를 가는 데 1시간 반 넘게 걸렸다. 조지 6세 국왕이 반갑게 그를 맞았다. 국왕 전용 발코니에 왕과 함께 서는 영예도 누렸다.

이어 체임벌린은 총리 관저가 있는 다우닝 10번가로 갔다. 관저 앞에서 그는 역사에 남을 연설을 한다. "나는 우리 시대의 평화가 왔다고 믿는다…이제 집으로 돌아가서 침대에서 편히 주무시라." 언론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의회에선 윈스턴 처칠 등 몇몇이 반론을 폈지만 소용없었다. 뮌헨협정은 찬성 369표, 반대 150표로 인준을 받았다.

그때 히틀러는 뭘 하고 있었을까. 뮌헨에 머무는 동안 체임벌린은 히틀러를 따로 만났다. 영국과 독일 두 나라가 불가침 협정을 맺자는 제안에 히틀러는 즉시 동의하고 서명했다. 나중에 독일 외무장관이 투덜댔다. 그때 히틀러의 대답이 걸작이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게. 그 종잇조각은 아무 의미가 없어." 히틀러는 1939년 3월 체코슬로바키아, 9월 폴란드를 침공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불가침 협정은 휴지 조각이 됐다.

체임벌린 가문엔 평화의 피가 흐르는 모양이다. 네빌의 이복형 오스틴 체임벌린은 동생보다 한참 앞서 평화협정을 맺은 공로로 노벨평화상(1925년)까지 받았다. 당시 영국 외무장관이던 오스틴은 독일.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영국 간 로카르노조약을 주도했다. 스위스 휴양지 로카르노에 모인 5개국 외상들은 독일이 프랑스.벨기에를 침공하면 영국.이탈리아가 즉시 프랑스와 벨기에를 돕기로 약속했다. 프랑스와 국경을 맞댄 독일 라인강 연안, 곧 라인란트 지역은 비무장지대로 비웠다. 그 조건으로 프랑스는 점령지이던 라인란트에서 철수했다. 다만 프랑스는 독일 국경선을 따라 마지노선을 깔았다. 마지노선은 당시 프랑스 국방장관이던 앙드레 마지노의 이름에서 땄다.

로카르노조약을 맺은 뒤 유럽은 평화 무드에 젖었다. 독일은 1926년 국제연맹에 가입했다. 오스틴에 이어 또 다른 조약 당사자인 독일 구스타브 슈트레제만, 프랑스 아리스티드 브리앙 외교장관도 노벨평화상(1926년)을 공동수상했다. 하지만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자 모든 게 달라졌다. 히틀러는 1936년 라인란트를 점령하고 무장을 시작했다.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세상이 아는 대로다.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들이 "노벨, 노벨"을 연호했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도 은근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로카르노조약을 읽어보길 권한다. 노벨상을 받는다고 평화가 오는 것은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영리하다. 트럼프 대통령을 구슬리는 걸 보면 안다. 문 대통령은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판문점선언이나 곧 나올 북·미 합의문이 21세기판 뮌헨협정이 되지 말란 법이 없다. 경계하고 또 경계할 일이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듯 평화 역시 거저 오지 않는다.
처칠은 같은 보수당 소속 네빌 체임벌린 총리의 외교전략을 대놓고 꾸짖었다. 지금 더불어민주당엔 그런 인물이 한 명도 없다. 오로지 문 대통령에게 처칠의 혜안을 기대한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