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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인찬 칼럼] 부두 경제학

이탈리아 포퓰리즘 정부도 일자리 효과 놓고 옥신각신
경제에 이념 입히면 역효과

[곽인찬 칼럼] 부두 경제학

요즘 이탈리아에서 가장 핫한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티토 보에리다. 사회보장연금관리공단(INPS) 이사장이다. 우리로 치면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에 해당한다. 보에리는 정권 실세 둘과 맞짱을 떴다. 1라운드는 마테오 살비니 내무장관, 2라운드는 루이지 디 마이오 노동산업장관. 살비니와 디 마이오는 이탈리아 포퓰리스트 연합정권을 이끄는 쌍두마차다. 보에리는 뭘 믿고 '만용'을 부리는 걸까.

1라운드에선 난민 문제를 놓고 붙었다. 올해 예순인 보에리는 난민을 받아들여야 연금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이탈리아는 고령화가 심각하다. 반면 난민들은 비교적 젊다. 이들이 일을 해서 돈을 내야 부족한 연금을 채울 수 있다. 살비니는 노발대발했다.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반이민 정책에 보에리가 대놓고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2라운드에선 일자리를 놓고 붙었다. 보에리는 새 정부가 이른바 존엄법(Dignity Decree)을 시행하면 일자리가 한 해 8000개, 10년간 8만개 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숫자도 줄여 잡은 거라고 했다. 존엄법은 기업이 비정규직을 쓰는 조건을 까다롭게 바꿨다. 계약기간은 3년에서 2년으로, 갱신 횟수는 5번에서 4번으로 줄였다. 해외 공장 이전에도 제동을 걸었다. 디 마이오는 격노했다. 자신의 대표 공약인 존엄법에 보에리가 재를 뿌렸기 때문이다.

보에리는 끄덕도 안 했다. 의회 청문회에선 '공중에 떠 있지 말고 땅에 발을 붙여야 한다'며 현 정권을 비판했다. 정치를 하는 살비니와 디 마이오는 난민과 일자리를 이념의 눈으로 본다. 경제학자인 보에리는 과학의 눈으로 본다. 보에리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이코노미스트다. 뉴욕대에서 공부했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통화기금(IMF), 국제노동기구(ILO), 세계은행에서 일했다. 밀라노 보코니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친다. 시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탈리아 경제는 엉망이다. 재정위기 때 나랏빚이 많은 이탈리아는 유난히 타격이 컸다. 연금은 줄고 실업률은 다락같이 올랐다. 청년실업률은 30%를 웃돈다. 지금은 어떻게든 경제를 살리려고 발버둥치는 중이다. 그러던 차에 포퓰리스트 정권이 들어섰다. 보에리는 입을 열었다. 노동을 존중한다는 정책이 일자리 상실로 이어지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는 학자의 양심을 걸고 맞섰다.

한국엔 보에리 같은 당찬 인물이 없다. 최저임금 정책과 일자리의 상관관계를 놓고 말만 무성할 뿐이다. 지난 6월 초 국책 한국개발연구원(KDI)의 박사 한 분이 용기를 냈다. 그는 최저임금의 가파른 상승이 일자리 감소를 부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국회는 그를 불러 이야기를 들을 생각조차 안 했다. 얼마 전 최저임금위원회는 내년 시급을 또 두자릿수 올렸다. KDI 경고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다른 이코노미스트들은 입을 꼭 다물고 있다.

엉터리 경제이론을 흔히 부두 경제학(Voodoo Economics)이라고 한다. 부두는 카리브해 연안의 주술, 미신을 말한다. 시장경제엔 요술 방망이가 없다. 그저 실증이 상책이다. 진보든 보수든 이념적 소망에 바탕을 두면 자칫 부두 경제학이 된다.
문재인정부가 소득주도성장 실험에 나선 지 1년이 넘었다. 현장에선 아우성이 끊이지 않는다. 언제까지 이 무모한 실험을 지켜봐야 하나. 보에리가 오늘 한국을 보면 과연 뭐라고 할까 궁금하다.

paulk@fn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