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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어 늦게 손에 든 책… 그 눈빛 만큼은 초롱초롱하죠"

[감동시리즈-우리함께] <13>늦깎이 학생들에게 배움 전하는 청솔학교 노기현 교장
대학생 때 우연히 듣게 된 야학 세미나 졸업 뒤 15년 동안 야학 교사로 활동
"야학은 사람을 위한 교육" 강조하면서 배움 필요한 사연 많았던 학생들 떠올려

"나이 들어 늦게 손에 든 책… 그 눈빛 만큼은 초롱초롱하죠"
경기도 성남에 있는 청솔야간학교는 어린시절 배움의 기회를 놓친 40~60대 늦깎이 학생들을 위한 야학기관이다. 15년째 나이 많은 학생들과 함께하고 있는 노기현 교장 선생님이 강의를 하고 있다. 사진=서동일 기자

"나이 들어 늦게 손에 든 책… 그 눈빛 만큼은 초롱초롱하죠"
배움의 꿈은 아직 멀기만 한데
내 마음 긴 여로에 올라 배움의 꿈 한자락 키워본다
삶은 고해이고 꿈은 희망인데
더 부서지기 전에 갈고 닦아 청솔 푸른 숲에서 큰 꿈 이루어 보련다
배움을 향한 그리움이 메아리 칠 때
배움의 꽃은 침묵하고 있어도
향기가 절로 피어나리라 ―청솔야간학교 한영애 '나의 꿈' 중에서
지난 15일 오후 6시 경기도 성남시의 청솔야간학교.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빨강 노랑 초록, 형형색색의 '꿈'들이 가장 먼저 손님을 맞이한다. 각각 저마다의 꿈과 시작을 이야기하고 있는 시화(詩畵)는 모두 청솔야간학교 학생들이 정성껏 쓰고 그린 작품이다. 이 시화를 그린 학생들은 모두 40~60대 사이의 늦깎이 학생들이다. 어릴적 배움의 기회를 놓쳐 남은 아쉬움을 청솔야간학교에서 원없이 풀며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청솔야간학교는 어린 시절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성인에게 배움의 통로를 안내해주는 무료 야학기관이다. 이 학교의 교장을 맡고 있는 노기현씨(65)는 벌써 15년째 학생들의 꿈을 키워주고 있다. 3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청솔야간학교는 현재 20명 이상의 자원봉사자 선생님들이 90명에 이르는 학생들과 꿈을 함께 한다. 검정고시 합격생만 700여 명을 배출했다.

오랜 공로를 인정받아 2017년 청솔야간학교는 단체 명의로 국민추천포상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또 노기현 교장은 2015년 대통령 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가 선정하는 '생활 속 작은 영웅'으로 뽑히기도 했다.

"나이 들어 늦게 손에 든 책… 그 눈빛 만큼은 초롱초롱하죠"


■우연히 접한 참교육의 길

노씨가 처음 야학을 접한 것은 대학생 때다. 연세대 국문과에 재학중이던 노씨는 신입생 시절, 우연히 야학 관련 세미나를 듣게 됐다. 신학과에 재학 중이던 6년 선배가 근로 청소년을 위한 천막야학을 세우고 봉사자를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노씨는 어린시절을 떠올렸다. 1960년대 모두가 어려웠던 그 시절, 돈이 없어 배우지 못하는 친구들이 생각났다.

천막야학은 성남시 판자촌에서 열렸다. 서울 연희동에 살던 시절, 청계천에서 성남시로 가는 한 대밖에 없는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반씩, 왕복 세 시간을 오갔다. 몸은 힘들었지만 자신보다 예닐곱 살 정도밖에 어리지 않은 친구들이 낮에는 일하고, 저녁엔 공부하는 열정을 생각하며 힘을 냈다.

노씨는 그때 가르쳤던 학생들과 아직도 연락을 주고받는다. 포털 사이트에 이름을 검색하면 나올 만큼 유명인사가 된 학생도 있다. 노씨는 "가장 열심히, 늦게까지 공부했던 학생인데 잘 돼서 나도 기분이 좋다"며 "아직도 가끔 인사하러 오는 걸 보면 뿌듯하다"고 말했다.

"나이 들어 늦게 손에 든 책… 그 눈빛 만큼은 초롱초롱하죠"
30년의 역사를 가진 청솔야간학교는 그동안 700여명의 검정고시 합격자를 배출했다.


■"학창시절 추억을 선물해줘요"

대학 졸업 후, 노씨는 선생님이 됐다. 서울 경문고에서 33년을 국어교사로 재직했다. 지난 2016년 정년 퇴임하기 전까지 노씨는 약 15년 동안 매일 일주일에 두 번씩 야학 교사로 봉사했다.

다시 야학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노씨는 "새로운 의미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몸은 지치지만 마음만은 보람있는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노씨는 "요즘 고등학교 학생들은 한 반에 5명 정도 공부할까 말까인 반이 많은데, 여기있는 분들의 눈은 전부 초롱초롱하다"며 "오히려 여기서 스트레스를 풀고 가는 현직 선생님이 많다"고 농담삼아 웃었다.

노씨는 학생들이 실제로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것처럼 느끼게 하기 위해 수학여행과 체육대회 등 이벤트를 아끼지 않는다. 이유를 묻자 "청솔야간학교가 검정고시만을 위한 학원은 아니니까"라고 답했다. 중고등학생 당시 가지지 못했던 추억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특히 기억에 남는 감동적인 순간은 졸업식에서 '교복 입어보기' 행사를 했을 때였다. 노씨는 "학생들이 가장 부러워하는게 교복"이라며 "단순히 옷에 그치는게 아니라 근로 청소년들이 가지지 못한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런 이벤트를 통해 청솔야간학교의 체계를 다지기도 했다. 10년 전만 해도 기록이나 체계가 없어 고생했던 경험을 토대로 학생들의 생활기록부같은 대장도 기록하고, 기수 체계도 만들었다.

다가오는 11월 기수 선배들이 와서 재학생들이 만든 음식을 다소 높은 가격에 사 먹고 후원하는 '일일호프'도 열린다. 노씨는 "다닐 때는 공짜로 다녀도 졸업하면 말이 다르죠"라며 웃었다.

"나이 들어 늦게 손에 든 책… 그 눈빛 만큼은 초롱초롱하죠"
청솔야간학교의 교훈은 '참된 교육, 바른 실천'이다.

■"사람을 위한 교육, 야학…더 많이 늘어나야"

'야학 봉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학생'을 묻자 노씨는 선뜻 한 명을 고르지 못했다. 학생들 한 명 한 명의 사연들이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놀이공원 식당에 우연히 취업했는데 고졸 이상이어야 한다고 해서 7개월만에 부랴부랴 검정고시를 합격한 학생, 한글을 못 읽어 사인을 해야 하는 택배가 올 때마다 설거지 하는척 해야했던 학생, 자식들이 학교에서 가져온 가정환경조사서에 '초졸'을 차마 쓰지 못해 거짓말로 '고졸'이라고 쓴 학생 등등 다양한 학생들이 기억에 남아요"라던 노씨는 "아, 청솔야간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돌아와서 학생들 가르치는 선생님도 기억에 남죠"라고 말했다.

교장선생님으로서 겪는 경영의 어려움도 분명 있다. 매년 새로 신청해서 받아야 하는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의 지원금을 받는 일부터 야학협의회를 통해 국가에 목소리를 내는 일까지, 혼자서 많은 일을 감당하려면 힘들 때도 있다. 아직 교장 자리의 후임자도 정하지 못했다. 그래도 노씨의 야학에 대한 뜻은 확고하다. 노씨는 "지금은 우리뿐만 아니라 야학 시설을 갖춘 곳이 대부분 무료, 혹은 아주 저렴한 학비를 받고 운영 중인데 대부분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다"고 운을 뗐다.

국가평생교육진흥원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의 초졸 이하 학력을 가진 인구가 전국적으로 250만 명에 이른다. 또 중졸 이하는 600만 명에 육박한다. 시 단위 지자체 한 곳당 5만명 꼴이다.

노씨는 "초등학교 과정의 한글 교육은 복지관 등 다양한 곳에서 운영하지만 중고등 과정의 야학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중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해주는 곳은 성남시에 청솔야간학교 하나뿐이다. 노씨는 "문맹은 단순히 읽고 쓰는 문제가 아니라 문장을 이해하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말한다"며 "인간을 인간답게 하기 위한 교육이 좀 더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이어 "고졸 검정고시까지 합격한 사람들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성취감에 대학도 가고 유학을 가기도 하며 꿈을 펼치는데, 이런 좋은 취지의 야학이 늘어나고 지원도 많이 되어야 한다는게 야학 교장으로서의 작은 바람"이라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onsunn@fnnews.com 오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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