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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영 칼럼] 남북 경협, 기업 등떠밀지 마라

비핵화 없는 北 특수는 착시.. 과거 서독도 정경분리 고수.. 대북 진출은 자율에 맡겨야

[구본영 칼럼] 남북 경협, 기업 등떠밀지 마라

평양냉면이 요즘 정상궤도를 비켜난 남북관계를 규정하는 열쇳말처럼 회자된다. 지난 9월 남북정상회담에 따라간 대기업 총수들이 옥류관에서 겪은 일 때문이다. 이들이 만찬에 동석한 리선권 북한 조평통 위원장으로부터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갑니까"라는 면박을 들은 사실이 뒤늦게 전해지면서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는 정확한 워딩이 확인 안 된 해프닝이란 시각도 있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북측에서 남북관계에 속도를 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 것 같다"며 무마하려는 낌새다. 그러나 그의 추측이 맞다면 대기업 총수들은 그 현장에서 더 모골이 송연했을 법하다. 가뜩이나 대기업들은 지금 넛 크래커에 끼인 처지라서다. 대북투자를 종용하는 듯한 정부와 북핵제재 스크럼이 흐트러지는 걸 막으려는 미국 사이에서 말이다.

문재인정부는 남북평화 무드로 '북한 리스크'가 줄면 경제호조로 이어질 것으로 봤다. '평화는 경제다'라는 여권의 캐치프레이즈가 그 징표다. 하지만 시장은 지금 구호와는 정반대 신호를 발신하고 있다. 지난해 9월 3일 북한의 6차 핵실험이 금융시장에 강한 충격을 줬을 때도 그다음 날 코스피지수는 2329.65에 마감했다. 하지만 지난달 말 한때 코스피지수는 2000 아래로 주저앉지 않았나.

물론 위기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벽에 부딪힌 소득주도성장론이나 미·중 무역전쟁 등 국내외 요인이 중첩되면서다. 다만 최근 국내 최대 주식 커뮤니티 팍스넷 게시판이 정부에 대한 불만으로 도배되다시피 하는 사실은 뭘 뜻하나. 한 투자컨설팅 전문가는 "진위를 떠나 정부가 남북관계에만 매달려 경제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식의 인식이 있다"고 했다. '남북평화론'이 빚어내고 있는 역설이다.

돌이켜 보면 한반도 이남의 우리가 가진 것이라곤 인적 자원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한국 경제는 오늘의 성취를 일궜다. 해외에서 원자재를 들여와 부가가치를 더해 되파는 수십년 사투 끝에…. 이를 몸소 체득한 기업들이 현 정부가 말하는 북한 특수(特需)를 내심 액면 그대로 믿긴 어려울 게다. 먼 훗날의 기대치에 불과함을 모를 리는 만무하다는 얘기다. 박근혜정부의 '통일대박론'이 그랬던 것처럼.

더욱이 한국 경제는 지금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국면이다. 생산·투자·소비 등 핵심 경기지표들이 동시 하향세를 보이며 이른바 '퍼펙트 스톰' 위기다. 설상가상으로 북한의 비핵화 의지도 여전히 미심쩍어 보인다. 미국의 북한 전문매체 38노스는 지난 2일(현지시간) 황해북도 평산군의 우라늄 광산시설이 계속 가동돼왔다고 보도했다.

"리선권은 그렇게 강하게 나와야 김정은 위원장한테 칭찬받는다."(북한 외교관 출신 고영환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 문제의 '냉면 발언'의 배경을 콕 집어낸 해석이다. 하지만 삼성그룹 1년 매출액만 해도 북한 국내총생산(GDP)의 12배가 넘는다. 글로벌 기업인들이 시장 메커니즘에 깜깜한 '김정은바라기'의 훈계를 들어야 할 까닭은 없다. 북핵 문제가 풀려 리스크가 줄면 기업들은 누가 말려도 북한에 들어갈 것이다.

통독 전 역대 서독 정부는 민간기업에 대동독 투자를 강요하지 않고 경협차관 제공 등 리스크를 떠안았다.
그것도 인적 교류 확대와 인권개선 등 조건부로. 문재인정부도 먼저 투자보장협정 등 경협을 위한 제도적 인프라 구축에 힘써야 한다.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풀리지 않은 현 단계에서 북의 선의만 믿고 기업인들의 등을 떠밀 일은 아니다. 정경분리 원칙을 지키면서 긴 안목으로 경협을 추진할 때다.

kby777@fnnews.com 구본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