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

[fn사설] 국민연금 의결권 자산운용사에 맡겨라

괜한 논란 휩싸이지 말고 日 공적연금 사례 따르길

국민연금과 한진그룹이 주총 대결에서 무승부를 기록했다. 대한항공 주총(3월 27일)에선 국민연금이 이겼다. 조양호 사내이사 연임안은 부결됐다. 그룹 회장이 주력 계열사 이사회에서 쫓겨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하지만 이틀 뒤 열린 한진칼 주총에선 조양호 회장 측이 완승을 거뒀다. 국민연금이 제안한 정관 변경안은 부결됐다. 국민연금은 재판을 앞둔 조 회장을 겨냥해 이사 자격을 깐깐하게 바꾸려 했으나 실패했다.

대한항공 주총을 두고 평가가 엇갈린다. 주주행동주의를 지지하는 쪽에선 '사변'으로 평가한다. 의결권 자문사인 서스틴베스트의 류영재 대표는 "자본시장의 촛불혁명"이라고 말했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지난달 29일 한 강연에서 "시장참여자와 사회의 인식을 바꾼 이정표"라고 말했다. 과거에 비해 경영환경이 확 바뀌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꼭 문재인정부가 아니어도 불가피했다. 4차 산업혁명 바람 속에 재벌의 이른바 황제경영은 시대적 사명을 다했다.

다른 한편에선 국민연금의 월권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보수 자유한국당은 국민연금법에 '5% 룰'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국민연금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정치적 관여를 배제하도록 관련법을 개정하겠다"고 말했다. 이미 국회엔 국민연금 의결권을 5% 이내로 제한하는 김종석 의원안이 제출돼 있다.

주목할 것은 김상조 위원장의 아이디어다. 김 위원장은 국민연금이 주주권 행사를 민간 자산운용사에 위탁할 것을 제안했다. 그 대신 국민연금은 운용사가 스튜어드십 코드(의결권 행사 지침)를 제대로 지키는지 감시만 하면 된다. 사실 이 방식은 이미 일본 공적연금(GPIF)이 시행 중이다. 국민연금은 자본시장의 슈퍼갑이다. 어떤 운용사도 감히 국민연금의 지침을 어기지 못한다. 만약 어기면 운용사를 교체하면 된다. 우리는 국민연금이 즉각 이 방식을 따르기를 권한다. 대한항공 주총장은 정치의 축소판이었다. 수익률에만 집중해야 할 국민연금이 괜한 구설에 휘말릴 이유가 없다.

궁극적으론 국민연금이 중립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지배구조를 바꿔야 한다. 국민연금은 109조원을 국내 주식시장에서 굴린다. 5% 넘게 지분을 가진 기업이 300개 가까이 된다.
이러니 큰 기업들은 죄다 국민연금 눈치를 본다. 요컨대 국민연금은 한국 자본시장의 재벌이 됐다. 행여 국민연금은 재벌의 전횡을 견제한다는 명분 아래 스스로 재벌 행세를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