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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박수주 늘었지만 여전한 '쥐꼬리 임금'.. 돌아오지 않는 노동자들[현장르포]

조선산업 심장 울산·거제·영암
수주난에 일자리 잃었던 8만명 대부분 이직이나 고령으로 은퇴
재취업해도 月 250만원이 고작 대우조선 매각에 거제도 뒤숭숭

선박수주 늘었지만 여전한 '쥐꼬리 임금'.. 돌아오지 않는 노동자들[현장르포]
지난 23일 울산 동구청에서 열린 조선산업 채용박람회장에서 한 하청노동자가 업체별 구인정보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최수상 기자


【 울산=최수상 기자】 지난 24일 촉촉한 봄비 속에 미포만 현대중공업 독(dock)에는 골리앗 크레인이 거대한 덩치에도 불구하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세계 최대 조선소인 현대중공업이 길었던 불황의 터널을 서서히 벗어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했던가. 겉보기와 달리 조선이 주력산업인 도시들은 봄이 왔지만 봄이 아닌 상황을 겪고 있다.

■분주한 골리앗 크레인… 인력 부족?

국내 조선산업은 지난 2015년 글로벌 경제위기로 불거진 수주난에 8만명 넘는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다. 울산과 경남 거제, 전남 영암 등 조선소가 있는 지역은 인구유출과 극심한 경제파탄을 겪었다. 선박 수주가 완연한 회복세로 돌아선 것은 3년 만이다. 지난해 뚜렷한 증가세를 보이면서 올해도 전망이 밝은 편이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2018년 국내 조선업 수주는 전년 대비 66.8% 증가했다. 7년 만에 세계 시장점유율(44.2%) 1위를 되찾았다. 수주량 변화는 지난 2013년 1844만CGT, 2014년 1307만CGT, 2015년 1099만CGT, 2016년 223만CGT, 2017년 757만CGT, 2018년 1308만CGT로 집계됐다.

현대중공업의 울산시, 대우해양조선과 삼성중공업의 거제시는 일자리 창출과 지역경제난 극복이라는 기대감에 봄날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지난 3년의 불황이 할퀸 상처는 깊었고, 새살이 돋아나 아물기까지는 녹록지 않다. 기대와 다른 실상이다.

조선업 불황으로 실제 일자리를 잃고 지역을 떠나야 했던 약 8만명의 사람들은 대부분 비정규직, 즉 하청업체에 소속된 노동자들이다. 정부가 '산업위기대응특별지역' 등을 선정해 가며 사태 확산을 막은 덕에 겨우겨우 버텨왔다. 그런데 수주량 증가로 일자리가 생기면 당연히 돌아올 것으로 예상했던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

■채용박람회… 절반은 노령은퇴자

지난 23일 울산 동구청에서는 수주량 증가 후 처음으로 조선산업 채용박람회가 열렸다. 현대중공업, 현대미포조선의 사내협력업체 27곳이 기술인력 300명을 채용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날 면접을 신청한 구직자는 고작 324명에 그쳤다. 이마저도 고령의 은퇴자가 절반이다보니 업체들은 구인난을 토로했다. 업체 관계자는 "기술력을 갖춘 사람들은 고령화 추세 속에 은퇴하고 있고, 현장에 적합한 젊은층은 아예 하청업체를 찾지 않아 숙련공을 키우는 것부터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일부 업체는 납품일정을 맞추기 위해 무리하게 높은 임금을 주고 사람들을 썼다가 결국 체불이 발생해 얼마 전 폐업한 곳도 있다"고 귀띔했다.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거부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이직을 결심하고 얼마 전 협력업체를 퇴직했다는 한 50대는 이날 면접을 보지 못했다. "죽을 둥 살 둥 일하는데도 250만원이 다예요. 여기 업체들은 임금 수준도 다 비슷한 곳이어서 면접 볼 곳이 없습니다"라고 이유를 토로했다. 현대중공업노조 비정규직회 한 관계자는 "잦은 임금체불, 사망사고를 걱정해야 하는 위험한 작업환경, 언제든 가능한 폐업과 해고, 3년 전 길바닥으로 내몰릴 당시와 조금도 변화가 없다보니 다시 울산을 찾으려는 노동자가 없는 게 명확한 현실"이라고 열악한 노동조건을 꼬집었다.

실제 수주량 회복에도 불구하고 울산 동구 인구는 올해 들어서만 약 2000명이 줄었다. 하청노동자들의 증감 지표인 방어진 꽃바위 원룸촌은 여전히 힘든 겨울을 보내고 있다. 현대중공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안정과 일감 확대로 그나마 지역경제가 안정세를 되찾았다는 점이 위안이 되고 있다.

■구조조정과 하청화 우려에 뒤숭숭

봄이 왔는데, 봄이 아닌 것은 경남 거제시도 마찬가지다. 현대중공업이 대우조선해양 인수절차에 본격 돌입하면서 노사갈등이 첨예하다. 매각을 반대하는 노조는 생존권 수호를 위해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노조와 지역사회는 이번 매각이 구조조정, 대우조선의 현대중공업 하청기업화, 거제지역 조선생태계 붕괴를 불러올 수 있다고 우려한다. 노조는 지난 2월 쟁의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한 상태이며, 지금은 현장실사 저지를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거제시 고현동의 한 상인은 "지금까지 잘 버텨왔는데 현대중공업의 인수가 동네를 뒤숭숭하게 만들고 있다"며 "앞으로 어떤 상황으로 전개될지 가늠할 수 없다는 게 진짜 불안감"이라고 말했다.

선박 수주량 회복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지난해 5월 '산업위기대응특별지역'으로 선정한 울산 동구와 경남 통영·고성, 거제 창원 진해구, 전남 영암·목포·해남 등 지역의 지정기간을 2년 연장키로 지난 23일 발표했다. 조선업 밀집지역의 심리적 안정과 경제 활성화까지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ulsan@fnnews.com 최수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