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

[fn사설] 日 의혹 제기만 말고 근거부터 밝혀야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한국 대법원의 배상 판결이 도화선이 된 일본의 무역보복이 장기화할 조짐이다. 일본이 반도체·디스플레이 등의 제조에 필요한 3대 핵심소재의 대한 수출을 금지하면서 파장은 확산일로다. 파문은 8일 한국 증시를 덮쳐 반도체에서 화학·유통·여행 등 거의 전 업종이 하락세로 돌아섰다. 한국 소비자들의 일제 불매운동이 시작되면서 조만간 일본 기업들에도 부정적 여파는 번질 것이다. 한·일 양국이 피차 더 큰 출혈이 생기기 전에 외교적 봉합수술에 나설 때다.

문재인 대통령은 8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피해발생 시 대응' 방침을 밝혔다. 그러나 이미 증시와 외환시장이 출렁거리는 터라 한가하게 들린다. 그럼에도 정부가 외교적 대응 기조를 밝힌 건 옳은 선택이다. 자유무역 정신을 위배한 일본의 경제보복에 '너 죽고 나 죽자'식 치킨게임으로 맞서는 게 현명한 일일 순 없다. 그런 맥락에서 세코 히로시게 일본 경제산업상이 9일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소재의 대한 수출규제 강화에 대해 "협의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은 건 유감스럽다. 과거사 갈등에 묶여 양국이 상호이익을 증진할 기회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한국의 대북제재 이행 문제를 물고 늘어지고 있어 더 걱정스럽다. 아베 총리는 7일 "(한국이) 국가 사이의 청구권 협정을 어기고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의 이런 핵심소재 수출제한 명분도 논란거리지만 "(대북) 무역관리 규정도 지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는 말은 그야말로 논리의 비약이다. 일본 언론을 통해 한국에 수출한 에칭가스의 일부가 화학무기용으로 북한에 들어갔다는 식의 의혹만 부풀리면서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어서다. 어찌 보면 외교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지렛대로 경제보복 카드를 빼든 아베 정부가 무리수를 두는 인상이다.


문재인정부는 민간기업들을 무역전쟁의 전면에 세울 게 아니라 정공법적 담판에 나서야 한다. 설령 수출규제 품목을 확대하려는 일본의 기도를 막더라도 "독가스 원료를 북에 넘긴다"는 류의 루머를 방치했다가는 우리의 국제신인도는 치명상을 입게 된다. 이참에 "확실한 근거를 대라"며 아베 정부에 제대로 따지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