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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100℃] '사랑의 불시착', 통일이라는 판타지

[북한 100℃] '사랑의 불시착', 통일이라는 판타지
'사랑의 불시착' 포스터(tvN 홈페이지) © 뉴스1


[북한 100℃] '사랑의 불시착', 통일이라는 판타지
tvN '사랑의 불시착' 제공 © 뉴스1


[북한 100℃] '사랑의 불시착', 통일이라는 판타지
tvN © 뉴스1


[편집자주][북한 100℃]는 대중문화·스포츠·과학 등 비정치적인 다양한 분야에서 북한과의 접점을 찾는 코너입니다. 뉴스1 북한팀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관심사와 관점을 가감 없이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서울=뉴스1) 이설 기자 = "다시 안 볼 거라서 하는 말인데 얼굴 완전 내 취향이에요. 통일되면 우리 다른 식으로 봐도 좋을 듯?"

패러글라이딩을 하다 태풍을 만나 비무장지대(DMZ)에 '불시착'한 윤세리(손예진 분)는 남한으로 돌아갈 거라 굳게 믿고 리정혁(현빈 분)에게 이렇게 도발한다. 북한 장교와 남한의 재벌 상속녀의 로맨스를 다룬 tvN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이야기다. 남북 경계선에서 방향을 헷갈린 세리는 북쪽으로 전력 질주하는 바람에 결국 정혁의 집에 머물게 된다. 그야말로 판타지(fantasy)다.

판타지 안에서는 사실 외계인과도, 인어와도 사랑할 수 있다. 상상력의 한계가 거의 없다. 이 드라마를 쓴 박지은 작가는 '별에서 온 그대', '푸른 바다의 전설'로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별그대'에서 외계인(김수현 분)은 원한다면 시간을 잠시 멈출 수 있다. '푸른바다의 전설'에 나오는 인어(전지현 분)가 흘리는 눈물은 진주가 된다. 실제로 그런지는 중요하지 않다. 판타지는 그렇다.

그런데 북한군 장교와 남한의 재벌 상속녀의 로맨스라면? 지난 14일 첫 방송한 '사랑의 불시착'은 화제성 1위에 올랐지만 '악플'도 유난히 많다. 핵심은 "아무리 현빈이라도 북한 장교와의 사랑 이야기라니, '제정신'이냐"라는 것. 북한을 너무 비현실적으로 묘사했다거나 미화했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외계인, 인어공주는 되고 북한군 장교가 '안 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아무리 김수현이라도 외계인이라니', '아무리 전지현이라도 인어라니'라는 반응은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사실 곰곰이 생각할 것도 없이 북한군 장교와의 로맨스는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또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지난해 관계가 꽤 좋아졌다지만 남북은 여전히 총부리를 겨누며 경계하고 있고, 북한은 올해만 해도 총 13차례 발사체를 쏘아 올리는 무력도발을 했다. 남북 정상이 포옹하고 악수하고 회담도 하더니, 북한은 다시 미사일 발사 시험을 한다. 진짜 통일이 오나 싶다가도 도발을 하니 '북한이 그렇지 뭐'라는 회의적 반응도 적지 않다.

그뿐이랴. 최근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에서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백마를 타고 백두산에 오르거나 얼린 물고기 덩어리(물고기 블로크)를 주민들에게 베푸는 모습을 보여줬다. 우리로선 상상도 하지 못할 일들이다. 대통령이 말을 타고 등산을 할 리 없고, 생선이 먹고 싶으면 마트에 가면 된다. 대중이 현실을 아예 외면한 채로 오롯이 '판타지'로만 북한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을 리 없다. 이 드라마의 판타지는 말하자면 조금은 불편한 판타지다.

박 작가는 대신 이 드라마를 위해 북한 전방부대 장교, 전방부대 사택 마을에 거주했던 군관의 아내, 보위사령부 간부, 장마당 상인, 꽃제비, 밀수꾼, 무역상, 운전공, 의사, 연구원, 유학생 출신의 피아니스트, 영화감독, 해외파견 음식점 종업원 출신의 탈북자를 인터뷰하면서 치밀하게 준비했다고 한다. 정전이 일상이고, 사람들이 때 되면 모여서 체조를 하고, 아이들끼리 거미줄을 떼고 노는 모습들은 이러한 취재를 통해 완성됐을 것이다.

물론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북한이 '진짜 북한'인지 '미화된 북한'인지 아직까지는 알 수 없다. 같은 장면을 보고도 혹자는 북한 마을을 정겨운 분위기가 있는 곳으로 묘사해 미화하려 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잦은 정전을 겪어야 하고, 따뜻한 물 한 방울 맘껏 못쓰는 북한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잘 드러냈다고 할 수도 있다. 우리가 북한에 대해 잘 알면서도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 이 드라마를 두고 팩트(fact)가 맞나 틀리나, 더 나아가 이런 드라마 제작이 옳은지에 대해서까지 논의되는 것이 나름 의미 있다고 보는 이유다.

드라마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북한 군인이 "어이 남조선, 후라이까지 마라"라고 하자 세리가 "후라이까지 마? 뭐 뻥치지 마 그런 말인가?"라고 대답하고, 다시 그 북한 군인이 "뻥치지 마? 후라이까지 마라 그런 말인가?"라고 되묻는 장면. 나는 "후라이까지 마라"라는 말을 두고 불통인 북한 군인과 세리의 대립을 통해 "통일이 되면 언어의 차이는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했다.

극중 세리도 '통일이 되면'이라는 가정을 자주 한다.
정혁에게 "통일이 되면 다시 만나자"라고 제안한 것 말고도 자신에게 끊임없이 협박을 하는 북한 군인에게 "통일되면 가만 안 둬"라고 했다. "통일이 되면"이라는 대사는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그야말로 가장 큰 판타지일 수 있다. 하지만 판타지에는 한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