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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한봉지 3.6년 vs 음란물 22만건 1.6년…

라면 한봉지 3.6년 vs 음란물 22만건 1.6년…
인터넷 메신저 텔레그램에서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의 성 착취물을 제작 및 유포한 혐의를 받는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25)이 25일 서울 종로구 종로경찰서 유치장에서 나와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2020.3.25/뉴스1 © News1 송원영 기자

(서울=뉴스1) 이비슬 기자 = 이른바 '박사방' 사건이 촉발한 국민적 분노가 사법부의 엄중한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로 번지고 있다.

3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트위터에서는 성범죄에 대한 사법부의 강도 높은 처벌을 요구하는 해시태그 운동이 이어지고 있다.

'#n번방은_판결을_먹고_자랐다' 해시태그를 단 트윗들은 초 단위로 올라올 정도로 반응이 뜨겁다.

시민들은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성범죄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텔레그램 방에서 미성년자를 협박해 만든 성 착취물을 수만 명이 관전한 이번 사건의 심각성이 도를 넘어섰다는 판단에서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은 미성년자를 포함한 피해자를 협박해 제작한 성착취 영상을 다수의 메신저에 유포·판매한 대규모 디지털성범죄다.

'박사방'이라는 비밀채팅방을 운영한 조주빈(25)이 지난 3월17일 검거되면서 현재까지 관련자 140명이 검거되고 23명이 구속됐다. 이와 유사한 익명 채팅방을 운영한 피의자들 가운데 10대 청소년도 상당수 포함돼 있어 충격을 더한다.

해시태그 운동에 동참한 트위터 이용자들은 "손가락 놀림 하나로는 성범죄의 카르텔을 깰 수 없다고 냉소하지 말자"며 "트윗을 볼 때마다 리트윗 해달라"는 내용을 공유하며 지지를 호소했다.

그간 상당수의 성범죄들이 솜방망이 처벌을 받는 데 그치면서 n번방 사건에도 같은 일이 되풀이될 것을 우려하는 시민들이 사법부를 규탄하고 나선 것이다.

앞서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에 n번방 사건 관련 피의자 '태평양' 조모군(18)의 재판을 맡은 오덕식 판사를 제외해 달라는 청원이 올라오자 해당 판사가 재판을 포기하기도 했다.

◇"처벌과 죄 비례하지 않아"

성범죄에 대한 법원의 솜방망이 처벌은 그간 법조계 안팎에서 꾸준히 제기돼온 문제다.

지난 2019년 아동·청소년이 등장하는 음란물 22만여 건을 '다크웹'을 통해 유통한 운영자는 법원에서 1년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반면 라면 한 봉지를 훔친 상습 절도범에게 법원은 2014년 징역 3년6개월 형을 선고해 국민의 공분을 샀다.

대학생 김모씨(23)는 "성범죄 판결을 보면 국민들이 분노하는 만큼 처벌받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며 "그 사람들이 지은 죄와 받는 처벌은 비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현행법상 성폭행을 저지른 경우 기본 3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범죄자가 반성하거나 동종 전과가 없으면 감경될 수 있다. 박사방을 운영한 조주빈에게 개인정보를 제공해 공범으로 붙잡힌 공익요원 A씨도 현재 두 차례 재판부에 반성문을 제출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었다.

특히 법조계에서도 이번 사건과 같이 온라인 성범죄의 경우 강력한 처벌이 쉽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 따르면 신체를 촬영한 촬영물의 경우 본인 의사에 반해 '유포'한 경우에만 처벌이 가능하다.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은 아동 및 청소년이 등장하는 음란물을 '내려받는' 등의 경우에만 처벌한다.

성범죄의 형량을 높이기 위해서는 살인죄 등 범죄와의 형평성을 고려해 전반적인 형량을 높이는 절차가 필요하기 때문에 해결이 쉽지 않다.

◇재판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는 제외…"판사 젠더 감수성 키워야"

피해자보다는 가해자에게 집중하는 사법절차가 낮은 형량에 영향을 미친다는 지적도 뒤따랐다.

형사소송법 제294조는 법원은 피해자의 신청이 있을 때 그 피해자를 증인으로 신문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재판에서는 이 규정이 현실적으로 지켜지기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의 설명이다.


김재련 변호사는 "디지털성범죄는 증거가 확보된 상태에서 피의자 조사가 이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피의자가 범행 사실을 자백했다고 하면 피해자 입장에서는 재판에 나가거나 탄원서를 제출할 일이 없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이어 "몰래카메라 촬영 범죄의 경우 신체부위를 촬영 당한 피해자가 누구인지 특정할 수가 없기 때문에 피해자의 입장을 들으려야 들을 수가 없다"며 "재판부가 피해자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피해 사실에 더 깊이 공감할 수 있는데, 재판장에서는 피고인의 '반성하겠다'는 이야기만 들으니 솜방망이 처벌이 계속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용우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이사도 "판사들에게도 성인지 감수성, 젠더 감수성을 갖추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며 "동시에 피해자의 목소리를 충분히 반영할 수 있는 법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