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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료자판기인가"…금융권, 쏟아지는 국감자료 요청에 '몸살'

"우리가 자료자판기인가"…금융권, 쏟아지는 국감자료 요청에 '몸살'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 모습. 2020.08.31 © News1 신웅수 기자

(서울=뉴스1) 장도민 기자 = "아니 우리가 무슨 자료 자판기도 아니고 5년치, 10년치 자료를 요구하면서, 그것도 금요일에 요청하고 월요일까지 달라고하면 주말에 출근하라는 건가"

금융사 직원들이 익명으로 의견을 나누는 한 블라인드앱 '금융라운지'에 올라온 외국계 은행직원의 하소연이다. 피감기관인 금융사들이 내달 초 국정감사를 앞두고 국회의원들로부터 쏟아지는 국정감사자료 요청에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다. 일부 금융사 임직원들은 자료 요청에 대응하느라 야근은 물론 주말에도 출근하고 있다.

국회 국정감사 자료 요청은 매년 반복되는 것이지만 올해에는 예년보다 더 많은 요청이 몰리고 있다. 지난해 해외금리연계 파생결합상품(DLF) 대규모 손실사태를 시작으로 사모펀드 환매중단이 잇따르면서 올해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의 초점이 소비자보호 관리·감독 실패쪽으로 맞춰졌기 때문이다. 특히 금융지주와 은행으로 자료요청이 집중되고 있다.

15일 금융권에 따르면 A시중은행이 지난 11일까지 금융당국으로부터 받은 국정감사 관련 자료 요청 건수는 지난해 같은기간보다 약 45% 증가했다. B시중은행의 경우도 전년동기대비 30% 증가했다.

통상 국회의원실이 금융감독원 등에 자료를 요청하면 금감원 등은 금융사에 이 사실을 전달한다. 이후 금융사 정보 수집 프로그램인 CPC(Central Point of Contact)를 통해 각 사로부터 자료를 받아 요청한 의원실에 전달한다. 각 금융사는 담당부서에서 자료를 만들면 담당임원의 확인을 거쳐 CPC담당부서나 본부 내 CPC 전담 직원이 이 자료를 CPC에 입력한다. 거쳐야할 과정이 많은데다 대외 제공 자료라는 특성상 꼼꼼한 확인이 필요하기 때문에 국정감사 시기가 다가오면 금융사의 업무에 차질이 빚어지는 일이 매년 반복되고 있다. 특히 불필요한 자료를 요청하는 경우나, 이미 제출한 자료를 중복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는 하소연이 나온다.

한 은행 관계자는 "21대 국회의 첫 국정감사다보니 더 의욕적이어서 다른 때보다 많은 자료 제출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며 "무엇보다 금융권에서 사모펀드 환매중단 등 사고가 끊임없이 이어졌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자료를 요청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사고와 무관한데도 자칫 영업전략 등이 드러날 수 있는 민감한 자료까지 아무렇지 않게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또다른 관계자는 "현재 CEO의 재임기간동안 진행했던 사업을 전부 요청하는 경우도 있었고, 자료를 제출해도 추가 자료요청이 쏟아지기 때문에 기존 업무가 마비될 정도"라고 말했다. 또 "불분명한 기준을 제시하고 알아서 자료를 제출하라고 하는 경우가 가장 난처하다"고 덧붙였다.

금융당국도 중간에서 조정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국정감사와 관련이 없거나 목적이 뚜렷하지 않은 자료에 대해서는 국회의원실 측에 조심스럽게 설명하기도 하지만 이들 역시 피감기관인 만큼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다. 한 당국 관계자는 "괜히 '지금 요청한 자료가 쓸데없는 것'이라고 말했다가 나중에 문제가 되면 휘말릴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최근 블라인드앱 금융라운지에는 'CPC 제발 그만'이라는 게시물이 올라온지 3일만에 공감한다는 내용의 댓글 수십개가 달렸다. 대부분 '그래 적당히 좀 하자', ' 양심적으로 월말에 받아간 숫자 또 달라고 하지 말자', '대체 왜 똑같은 내용을 의원실마다 구간만 다르게해서 계속 요청하나', '보지도 않을거면서 5년치 내역을 달라고한다', '다들 비슷하구나', '청원합시다', '그렇게 보채서 받은 자료를 정작 사용하지 않는다' 등의 내용이다.

각 금융사 CEO들도 이같은 상황을 인지하고 있지만 자료 요청에 응하는 것 이외에는 뾰족한 대안이 없다. 특히 올해는 금융권에서 사건·사고가 잇따라 발생한 만큼 국정감사장에 소환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몸을 사리고 있다.
피감기관들이 의원실의 자료 요청에 불성실하게 대응할 경우 보다 강도높은 검사 대상이 되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기 때문이다.

한 금융사 관계자는 "잘못하면 CEO가 소환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모든 의원실에서 의미없는 자료를 요청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수의 의원들이 그런 것은 맞다"며 "일단 다 달라고 보자는 식인 경우에도 맞출 수밖에 없다"고 허탈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