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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스트리트] 日 탈도장·탈팩스

병아리 기자 시절인 1980년대 중반. 당시엔 사건 현장에서 데스크에 전화로 긴급기사를 구술하는 일도 흔했다. 그러니 원고나 도표의 이미지를 전기적 신호로 변환해 전화선을 통해 전송하는 팩시밀리(팩스)는 여간 요긴하지 않았다. 일제 팩스 앞에서 먼저 기사를 보내느라 경쟁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일본의 고노 다로 행정개혁 담당상이 27일 '팩스 폐지' 방침을 밝혔다. 즉 "e메일이나 온라인으로 정보를 모으면 기업이나 지방자치단체의 편리성이 높아진다"면서다. 스가 요시히데 새 내각에서 행정 및 규제 개혁을 담당한 그가 '탈(脫)도장' 선언에 이어 내놓은 행정개혁 2탄인 셈이다. 그는 이날 회견에서 "도장을 없애면 서류를 프린트할 필요도 없어진다"며 '탈도장·탈팩스' 패키지 추진의 취지를 설명했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재택근무를 실시하는 기업이 급증했다. 하지만 서류에 도장을 찍기 위해 출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잇따랐다." 일본 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요리우리신문의 지난 5월 31일자 사설의 일부다.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도장 찍는 관행에서 탈피하자는 논지였다. 서명(사인) 대신 날인으로 각종 문서의 공신력을 인정하는 문화가 일본 사회에서 그만큼 뿌리 깊다는 방증이다.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지난 4월 날인 관행을 재검토하라고 지시했던 한 배경이다.

도장은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권에서 행정·금융 등 각종 업무의 전자화를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한때 최첨단 장비였던 팩스도 정보가 빛의 속도로 흐르는 정보화 사회에선 구닥다리다. 일본에선 속도만의 문제도 아니다.
받는 사람은 '클릭'하는 수고를 덜면서 자료를 집어들 수 있지만, 보내는 사람에겐 e메일이나 메신저 등에 비해 훨씬 번거로운 수단이다. 어찌 보면 일본의 '수직적 사회'를 상징하는 잔재인 셈이다. 탈도장·탈팩스는 이런 아날로그 문화에서 벗어나려는 일본의 때늦은 몸부림으로 해석된다.

kby777@fnnews.com 구본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