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 돈 받아서 분탕질
금융허브 꿈 산산조각
제도 틀부터 새로 짜야
한국 금융의 웅대한 꿈을 처음 꾼 이는 노무현 대통령이다. 취임 첫해인 2003년 동북아 금융허브 전략을 세웠다. 이때도 한국이 홍콩·싱가포르와 정면으로 붙는 건 어렵다고 봤다. 그 대신 자산운용 시장은 해볼 만하다고 여겼다. 이명박 대통령은 금융허브 전략을 일보 전진시켰다. 2009년 자본시장법이 시행됐고, 서울 여의도와 부산 문현지구가 금융중심지로 지정됐다. 한국판 골드만삭스는 당시 유행어였다. 2011년엔 한국형 헤지펀드가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도 사모펀드 정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사모펀드가 모험자본 시장의 젖줄 역할을 할 것이란 기대 아래 2015년 진입규제를 왕창 풀었다. 그 뒤 사모펀드 시장이 양적으로 팽창했다. 자산운용사는 2015년 93곳에서 2019년 292곳으로 늘었다. 자산운용사가 굴리는 펀드 수는 1만2000여개로 불었다.
문재인정부는 그 덤터기를 썼다. 규제가 풀린 틈을 비집고 온갖 편법이 판을 쳤다. 무자격자들이 고객 돈으로 분탕질을 쳤다. 그런데 이 난장판 속에 현 정부와 가까운 이들도 꽤 보인다. 청와대도 연일 언론에 오르내린다. 그러니 덤터기를 썼다고 항변도 못 한다.
사태 초기 나는 라임 사태를 일종의 성장통으로 봤다. 박근혜정부가 규제를 푼 것도 장기적으로 올바른 선택이라고 여겼다. 전문투자형 사모펀드, 곧 헤지펀드가 모험자본 구실을 할 거란 기대도 품었다. 정치권 연루설은 애써 곁가지로 취급했다. 비리를 바로잡되 사모펀드 시장 자체는 건드리지 않았으면 했다. 자산운용에 특화된 금융허브 구축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옵티머스 사태를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한마디로 헤지펀드 시장은 난장판이다. 금융은 신뢰를 먹고 산다. 그 신뢰가 산산조각이 났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다 금융허브의 꿈이 영영 몽상으로 끝날 듯싶다. 어떻게 해야 하나.
철저한 수사가 출발점이다. 그런데 시작도 하기 전에 예감이 불길하다. 법무부와 대검이 또 붙었다. 두 기관 사이에 벌어지는 감정 싸움은 이제 듣기만 해도 지긋지긋하다. 이러다 사모펀드 수사가 산으로 가게 생겼다. 이럴 바에야 아예 처음부터 특검에 맡기는 게 낫다.
이럴수록 금융당국이 정신을 바싹 차려야 한다. 수사 결과와 상관없이 사모펀드 제도를 대대적으로 손질해야 한다. 공모와 달리 사모(私募)는 정보의 비대칭성이 심하다. 마음만 먹으면 대리인(사모펀드)이 얼마든지 주인(투자자)을 속일 수 있다. 실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이를 막으려면 아무나 사모펀드 대주주가 될 수 없게 자격을 엄격하게 둬야 한다.
동시에 개인투자자 자격도 더 깐깐하게 바꿀 필요가 있다. 최소투자금액을 1억원에서 3억원으로 올리는 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투자이력도 꼼꼼히 살펴야 한다. 은행이 보수적인 고객을 상대로 사모펀드 투자를 권유하는 게 타당한지도 다시 짚어보길 바란다. 또 은행·증권사 등 판매채널은 사후 모든 책임을 진다는 자세로 사모펀드를 선별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한국의 금융 후진성은 늘 경쟁력 순위를 갉아먹는 요인이다. 라임·옵티머스 사태를 보면 그 이유를 알 만하다. 규제의 끈을 조이면 당분간은 사모펀드 시장이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다. 더 멀리 뛰려면 한발 뒤로 물러서야 한다. 지금 일보 후퇴야말로 진정한 성장통이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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