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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땐 불편했던 슈만, 이제는 이해합니다" [백건우를 만나다]

파이낸셜뉴스와 함께하는
백건우와 슈만
오늘 롯데콘서트홀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
그와 상반된 인생의 아픔
그 양면성이 슈만에겐
창작의 자극제 아니었을까
아베크 변주곡'으로 시작
죽기 전 완성한 유작
'유령 변주곡'으로 마무리

"젊었을 땐 불편했던 슈만, 이제는 이해합니다" [백건우를 만나다]
피아니스트 백건우 / 빈체로 제공

파이낸셜뉴스 창간 20주년과 강남 신사옥 이전을 기념해 열리는 '파이낸셜뉴스와 함께하는 백건우와 슈만' 콘서트를 앞두고 지난 12일 피아니스트 백건우(74)를 만났다. 연주자로 산 64년의 삶은 그에게 '건반 위의 구도자'라는 별명을 안겨주었다. 특유의 부드러운 웃음으로 상대를 무장 해제시킨 백건우는 무대 아래에서도 '구도자'다운 면모를 드러냈다.

■"그 고통 속에서도 그렇게 훌륭한 곡들을…"

"슈만의 음악은 우리들에게는 더 없이 매혹적이고, 날아오르게 하고, 한없이 사랑스럽다. 우리들은 이 매혹적인 작곡가를 위협하고 집어삼킨 깊은 어둠, 그 밤을 알기에, 그의 음악을 더 사랑하게 된다."(헤르만 헤세의 수필집 '음악' 중)

백건우는 1970년대 라벨 전곡 연주를 시작으로 라흐마니노프, 베토벤, 리스트, 쇼팽 등 각각의 음악가를 깊이 파고들며 그들의 세계를 조망해왔다. 지난 1년여 동안을 슈만 연구에 바친 그는 지난 9월 '슈만' 신보를 내놨다. 낭만주의 작곡가의 음악을 자주 연주했지만 '낭만주의 음악의 대가' 슈만의 앨범을 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슈만의 피아노곡은 피아니스트한테는 절대적인 레퍼토리입니다. 슈만은 피아노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작곡가죠. 그런데 개인적으로 뭔가 슈만이라는 작곡가가 불편했습니다."

46살에 생을 마감한 슈만은 생존 당시 뛰어난 재능으로 유명했지만 고난도 많았다. 음악가가 되는 걸 지지한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머니의 뜻에 따라 법학도가 됐지만 미련을 못 버리고 뒤늦게 작곡과 피아노를 배웠다. 손가락을 다쳐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어야 했던 그는, 스승의 딸이었던 9살 연하 피아니스트 클라라와 사랑에 빠졌으나, 힘들게 결혼했다. 스승의 반대로 재판 끝에 사랑을 쟁취한 것. 40대에 정신분열증이 악화돼 강에 뛰어들기도 한 그는 결국 제 발로 정신병원에 들어갔다. "(작곡가 슈만의 음악이 불편했던) 이유를 잘 몰랐는데 이번에 보니 슈만의 세계가 그만큼 복잡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슈만이 어떤 인생을 살았고 어떤 심정으로 정신병원에 갔는지 이해하게 됐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한테 위협이 되지 않게 그들에게서 스스로 멀어지는 슈만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어요." 백건우는 슈만이 자신의 인생에서 순조롭게 이룬 게 하나도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가장 힘들었던 점은, 둘도 없는 음악성을 갖고 태어나 그걸 표현하지 못할 때가 아니었을까? 슈만은 마음의 안정이 찾아오면 곡을 한없이 쏟아냈죠.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수많은 곡들을 어떻게 썼는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훌륭한 곡들을, 그 고통 속에서…"

이번 신보는 슈만의 초기와 말년의 작품들에 주목한다. 두 장의 CD에는 각각 '오이제비우스'(몽환적이고 부드러운 면)와 '플로레스탄'(대담하고 충동적인 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슈만이 죽을 때까지 갖고 있던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과 그와 상반된 '인생의 쓰라림', 모든 이들의 아픔을 대변하는 슈만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누구나 다 양면성을 갖는데, 특히 슈만에게는 그것이 창작의 자극제가 된 것 같습니다."

백건우는 23일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이번 연주회를 슈만이 스무 살에 내놓은 첫 곡 '아베크 변주곡'으로 시작해 죽기 전 정신병원에서 완성한 유작 '유령 변주곡'으로 마무리한다. "'아베크 변주곡'은 클라라가 초연하며 슈만이 작곡가라는 것을 세상에 처음 알린 곡입니다. '유령 변주곡'은 한 음 한 음이 살아있는 곡이에요. 슈만이 이 곡을 창작할 당시 정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는지 의문이 들게 할 정도로 정교해요. 나도 이번 기회에 슈만을 재발견한 셈입니다."

"젊었을 땐 불편했던 슈만, 이제는 이해합니다" [백건우를 만나다]
영화배우 윤정희(왼쪽)와 피아니스트 백건우 부부/뉴스1

■"아내 윤정희, 기억 점점 사라지나 몸은 건강해"

영화배우 윤정희와 결혼한 백건우는 로맨티스트로도 유명하다. 1972년 뮌헨올림픽의 문화 행사로 열린 윤이상의 오페라 '심청' 공연장에서 처음 만난 둘은 2년 뒤 윤정희가 프랑스로 유학을 가면서 재회했다. 그들은 몽마르트 언덕에 낡은 집을 구해 동거를 시작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사랑했고, 1976년 이응노 화백의 주례로 소박한 결혼식을 올렸다. 윤정희는 지난 6일 제10회 아름다운예술인상에서 공로예술인상을 수상했다. '아내 바보'인 그는 알츠하이머로 투병 중인 윤정희의 트로피를 대리 수상하며 눈물을 훔쳤다.

딸과 함께 프랑스에서 살고 있는 윤정희의 건강을 묻자 백건우는 "기억은 점점 사라지지만 신체는 건강하다"며 "몇 년 전만 해도 내가 음악 이야기를 하다 영화로 화제를 바꾸면 얼굴이 화사해졌다"고 회상했다.

1977년 납치미수사건 등 인생이 곧 예술이 될 정도로 많은 일을 겪어온 백건우는 특히 미국 유학 시절, 죽을 뻔했던 일화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는 15살 때 미국 뉴욕에서 열린 콩쿠르에 참석했다 인생이 바뀌었다. 세계적인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의 눈에 들어 줄리아드 음대에서 수학할 기회를 얻은 것. 하지만 가난한 유학생의 타국 생활은 외롭고 배고팠다.
"추운 겨울이었는데, 제대로 못 먹은 상태에서 맨해튼 거리를 몇 십 블록 걸어 그야말로 기진맥진한 상태로 집에 돌아왔어요. 내 방 건너편 건물 창문에서 '이리와, 이리와' 하는 환청이 들려 나도 모르게 창가로 갔다가 정신을 잃었어요. 다행히 몸이 창문 바깥이 아닌 방바닥 쪽으로 쓰러졌죠." 10시간가량 흐른 후 눈을 떴다는 그는 "순간 모든 걱정이 사라졌다"고 했다. "내가 쓸데없는 고민을 참 많이 했구나. 그때부터 사소한 일에 연연하지 않게 됐죠. 그 사건은 어떻게 보면 제 부활이라고 할 수 있어요." 10대 소년은 어느덧 백발의 노장이 됐고, 얼굴의 주름만큼 깊어진 음악 세계로 세상과 소통한다. "지인이 요즘 건배사로 '백건우'라고 외친대요(웃음). '백세까지, 건강하게, 우렁차게'라는 뜻이라네요." 우렁차게 대신 우아하게는 어떠하냐고 하자 그는 "그럼 너무 욕심이 많은 거 아닐까요?"라며 허허 웃었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박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