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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이 주신 두번째 삶.. 밴조에 내 이야기를 담아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다 [Guideposts]

베트남전쟁 참전했던 돈 엠브레이
13년 군생활후 평범한 삶을 원했지만
이혼과 파산을 겪으며 '실패자'가 됐다
하나님께 물었다, 어떻게 살면 좋을까요
그리고 오래된 기억속 밴조를 꺼냈다
직접 몸통을 만들고 해병대 장식을 달고
술집 아닌 재향군인을 위한 무대에 섰다
내가 만든 악기를 보러 몰려든 사람중에
전쟁의 상흔 없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서로 위로했고 온전함을 되찾았다

그분이 주신 두번째 삶.. 밴조에 내 이야기를 담아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다 [Guideposts]
베트남전 참전 용사인 돈 엠브레이는 "교회 성가대에서 밴조 연주자로 활동하며 베트남에서 겪었던 고통스러운 기억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자신이 직접 재료를 구하고 미국 해병대 상징물로 장식한 그의 악기는 그가 이제 절망에서 벗어나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이 주신 두번째 삶.. 밴조에 내 이야기를 담아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다 [Guideposts]
수년간 밴조를 제작했지만 이번은 조금 특별했다. 내 인생 이야기가 이 밴조에 담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밴조가 연주되는 매 순간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내 진실이 알려지기를 바랐다.

나는 지금 살고 있는 버지니아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워싱턴DC 외곽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은 행복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과묵하고 근면한 사람이었지만 술만 마시면 돌변했다. 아버지처럼 될까 봐 겁이 났다. 군에 지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마자 해병대에 입대했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일 때 그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13개월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거기서 본 것들로 겁에 질린 채. 그리고 한 가지 의문에 사로잡힌 채. 수많은 전우들은 돌아오지 못했는데 왜 나만 돌아온 거지? 나는 전쟁을 반대하는 여론이 그렇게 거센지 몰랐다. 처음 군복을 입고 나갔을 때 사람들은 나에게 야유를 퍼부었고, 침을 뱉기도 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나는 나라를 위해 봉사했다. 끔찍한 고통도 목격했다. 죽음과 파괴의 장면들을. 나는 해병대 제복을 치워버렸다. 그리고 베트남전쟁에 대한 모든 기억을 지우고 새롭게 삶을 시작하기 위해 노력했다.

전쟁에서 돌아온 뒤에는 전기회사 기술자 따위의 잡다한 일을 전전했다. 전쟁 직전에 결혼을 했고, 딸도 둘 낳았다. 나는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원했다. 그러다 아내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베트남전쟁에서 돌아온 뒤로 나는 가족을 부양하는 일을 잘해 내지 못했다. 우리는 결국 이혼했다. 나는 가족을 떠났고, 딸들과도 연락을 끊다시피 했다.

버지니아주에 있는 한 자동차 정비소에 취직해 일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점심시간에 정비소 감독이 케이스에서 바이올린을, 다른 직원이 기타를 꺼냈다. "자네 다룰 수 있는 악기가 있나?" 감독이 물었다.

"아뇨." 내가 말했다. 나는 음악을 사랑했지만 악기는 한 번도 배워 본 적이 없었다.

"밴조 파트를 넣어줄 수 있네." 감독이 말했다.

두 사람이 연주를 시작하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베트남에서부터 따라온 극심한 괴로움이 조금 누그러졌다. 나는 최면에 걸린 듯 두 사람의 손가락 움직임을 지켜보며 음악에 귀 기울였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음악만이 남았다.

그길로 값싼 밴조를 하나 사서 독학하기 시작했다. 음악에 타고난 소질이 있는 것 같아 무척 기분이 좋았다. 곧 정비소 직원들의 연주에 동참하고, 집에서도 틈만 나면 연주할 정도의 실력이 되었다. 몇몇 술집에서 공연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우리는 연주가 끝나면 술집에 남아 술을 마셨다. 음악과 술. 이 얼마나 멋진 조합인가. 그것은 전쟁에 대한 기억, 죄책감, 가족에게 준 상처, 음악이 끝나면 곧장 끓어오르는 감정들을 말끔히 잠재웠다.

나는 공연을 애타게 기다렸다. 공연이 없는 날에는 집에서 혼자 술을 마셨다. 어느새 아버지처럼 되어갔다. 여러 해 동안 내 삶은 음주와 새 출발을 위한 변덕스러운 시도들 사이에서 비틀거렸다. 정비소와 밴드에서 멀어졌고, 밴조도 옷장 안에 넣어 버렸다. 그리고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며 재혼을 했고 메릴랜드에 땅을 사서 집을 지었다.

내 두번째 아내 샌디는 해외 참전용사 모임에 들어가 보라고 나를 설득했다. 그녀는 다른 참전용사들과 교류하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두어 번 모임에 나가 보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그토록 묻으려고 애썼던 고통스러운 기억들만 되살아날 뿐이었다.

샌디는 참을성이 많고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내가 재활 프로그램을 끝낸 뒤 다시 술에 빠져 지내자 크게 실망했다. 우리는 결국 헤어졌다.

2008년 금융위기 때 직장을 잃고 나서는 술을 더 많이 마셨다. 결국 간에 문제가 생겼다. "술을 끊어야 해요. 이러다 죽을 수도 있어요."

의사가 말했다.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술을 마셨다. 술독에 빠져 인사불성으로 지내던 어느 날, 우체통에서 자산압류 통지서를 발견했다. 나는 사실상 파산 상태였고, 집 대출금을 갚지 못하고 있었다. 절박한 심정에 큰딸에게 연락했다. 성인이 된 큰딸은 부동산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동안 연락을 끊다시피 한 아버지의 전화가 반가울 리 없었다. 하지만 자식 된 도리로 도와주겠다고 했다.

"압류 전에 집을 팔고 그 돈으로 더 작은 집을 사드릴 거예요." 딸이 말했다.

우리는 집을 보러 함께 다녔다. 큰딸이 집 안을 살피는 동안 나는 집 앞 현관에 서 있었다.

"먼저 들어가거라. 난 잠깐 밖에 있다 들어가마." 내가 말했다.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았다. 자동차 밖으로 나오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완전히 패배자가 된 기분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무일푼 신세에 두 번이나 이혼했고, 자식들과도 멀어졌다.

나를 표현하는 유일한 단어는 '실패자'였다. "하나님, 저 좀 제발 도와주세요."

왜 그런 말이 나왔을까? 평소에 기도도 하지 않는데.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 기도만이 이제 닫히면 영원히 열리지 않을 문에서 새어 나오는 한 줄기 빛, 내 유일한 생명줄처럼 느껴졌다.

그 후 일어난 일들을 설명하기는 힘들다. 정비소에서 두 사람의 연주를 처음 들었던 순간과 비슷했지만, 완전히 다른 차원이었다. 나 자신에게 느꼈던 그 모든 혐오와 경멸이 눈 녹듯 사라졌다. 문자 그대로 육체의 해방감 같은 것이었다. 나를 둘러싼 모든 방어물이 붕괴되는 듯한 감각. 연약하지만 보호받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지은 죄들을 하나님께서 너그러이 봐주신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어쩌면 내 실패들 때문에 더욱더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그리고 나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셨다. 무조건적으로. 그래서 나도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사랑을, 그 은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랑과 은총이 술로 묻으려 했던 그 모든 고통스러운 곳들을 채워 주었다. 커다란 충격처럼 안도감이 밀려왔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빠? 괜찮으세요? 술 한 잔 드시겠어요?" 큰딸이 말했다.

"아니, 괜찮다." 그 대답에 나는 무척 놀랐다.

밴조 헤드가 도착했다. 절단기를 사용해 둥그런 나무 테두리를 만든 다음 밴조 목에 부착했다. 이제 남은 작업은 진주 상감 장식을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켄터키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 디자인을 미리 보내 놓았다. 아주 특별한 디자인이었다. 지금까지 만든 밴조들과는 사뭇 다른 밴조가 될 것이다.

그날 집 앞 현관에서의 일이 있고 나서 내 삶은 기적의 연속이라고밖에는 표현할 도리가 없는 방식으로 펼쳐졌다. 더는 술독에 빠져 지내지 않았고, 간도 치유되었다. 버지니아주에 작은 집을 마련했고, 일자리도 구했다. 베트남에서 돌아온 이후 처음으로 내가 살아남은 이유를 스스로에게 질문할 용기도 생겼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지? 나는 기억 속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바로 오래된 밴조였다. 나는 옷장에서 그것을 찾아냈다. 조율을 하긴 했지만 연주를 하려니 망설여졌다. 코드 몇 개를 시도해 보았다. 연주가 되었다.

그런데 어디서 연주하지? 술집은 안 된다. 다른 장소가 필요했다. 며칠 후 친구와 통화를 하던 중에 친구가 한 교회 성가대에서 밴조 연주자를 구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 교회에서 주일마다 연주했다. 신자들 앞에 서서 하나님을 위해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니 마치 집에 돌아온 것처럼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얼마 후 나는 밴조를 직접 제작하기 시작했다. 내 삶을 음악으로 채우고 싶었다.

진주 상감 디자인이 도착했다. 상자를 열었다. 장식물은 'United States Marine Corps(미국 해병대)', 이 네 단어와 해병대의 상징인 독수리, 지구, 닻이었다. 이것들을 밴조의 헤드 위아래로 배치할 것이다. 거기에 밴조의 목을 장식하는 데 쓰곤 하던 해병대 계급을 상징하는 그보다 더 작은 장식물들을 더할 것이다.

이 밴조는 해병대에 바치는 존경의 표시였다. 해병대에서의 시간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내 의지의 상징이기도 했다. 다가오는 재향군인의 날 야유회 때 이 밴조를 연주할 계획이었다. 야유회 장소에 도착한 나는 자원봉사 밴드에 합류하기 위해 참전용사들과 그 가족들 사이를 뚫고 무대로 향했다. 이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미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밴조를 보고 싶어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겪은 일을 서로 이야기하고 싶어 할 것이다.

이 밴조 때문에 나는 도망치지도 못할 것이다. 연주가 끝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후 사람들이 밴조를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다가왔다. "정말 아름다워요. 어디서 사신 거예요?" 근처에 서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이 물었다.

"제가 직접 만들었습니다." 곧 사람들이 나를 에워쌌다. 밴조 덕분에 전쟁에 대한 진솔한 대화들이 오갔다. 그동안 내가 느꼈던 베트남전쟁에 대한 상충되는 감정들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대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전쟁의 상흔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전쟁으로 무너졌지만 하나님의 은총으로 다시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선생님의 밴조를 사진 찍어도 될까요? 제 남편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제 남편도 아프가니스탄에 참전한 해병이거든요. 이걸 보면 무척 좋아할 거예요." 한 여성이 말했다. 나 또한 기분이 좋았다.

야유회가 끝난 후, 나는 트럭을 타고 집으로 향했다. 밴조는 내 옆자리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내가 바라던 대로 진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 자신도 진실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었다.

'가이드포스트(Guideposts)'는 1945년 노먼 빈센트 필 박사에 의해 미국에서 창간된 교양잡지로, 한국판은 1965년 국내 최초 영한대역 잡지로 발간되어 현재까지 오랜 시간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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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가이드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