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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인찬 칼럼] 일자리와 젠더동맹

청년 젠더갈등은 자충수
정규직 귀족노조 상대로
대선에서 한목소리 내길

[곽인찬 칼럼] 일자리와 젠더동맹
오래전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블로그에 글을 올린 적이 있다. 평소 인기 없는 블로그인데 뜻밖에 댓글이 제법 달렸다. 그때 젠더 갈등이 심하다는 걸 실감했다. 남성 댓글에 이런 내용이 있다. "꼰대세대가 했던 꼰대짓들을 20대·30대 (남자) 보고 사과하고 책임지라고 하는 현 실태가 안타깝네요." 여성 댓글에 이런 내용이 있다. "남자, 태어나는 순간 갖는 그 프리미엄을 의식하지 않는 한 양성평등 참 요원한 얘기지요." 갑갑했다. 해결책이 안 보이니까.

그러다 얼마 전 무릎을 쳤다. 서강대 이철승 교수가 쓴 책 '쌀 재난 국가'에서 젠더 갈등을 줄일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다. 이 교수는 갈등의 뿌리를 일자리 경쟁에서 찾는다. "청년 남성의 좌절은 좋은 일자리 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한데 취업시장에서 경쟁자로 등장한 여성들로 인해 구직에서 탈락하는 비중이 높아짐에 따라 비롯되는 '구조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여성이라고 불만이 없으랴. 영국 이코노미스트지가 올 3월에 발표한 유리천장 지수(Glass Ceiling Index)를 보라. 기업 내 여성임원 비율, 국회 내 여성의원 비율 등을 비교한 수치다. 한국은 100점 만점에 24.8점으로 29개국 가운데 단연 꼴찌다. 9년째 바닥을 긴다. 1등 스웨덴(84점)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밖에서 본 한국은 철저히 남성 중심 사회다. 그런데 여자가 좀 더 갖겠다고 하니까 저항이 말도 못하게 심하다.

이 갈등을 어떻게 풀어야 하나. 노동경제학적 해법에 초점을 맞추면 청년용 좋은 일자리를 늘리면 된다. 인심은 곳간에서 나온다고 했다. 일자리가 넉넉하면 청춘남녀들이 상대방을 좀 더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걸림돌은 넘사벽에 가까운 벽, 바로 연공급제다. 나이를 먹으면 호봉이 저절로 오르는 제도다. 최대 수혜자는 대기업·공기업 정규직 노조다. 이들이 노동계급의 최상층을 형성한다. 이 교수는 "연공제를 개혁함으로써 청년 노동시장에 숨통을 터줘야 이러한 '구조적 좌절'이 완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규직 노조는 연공제 성(城)을 쌓았다. 일단 이들이 인건비를 뭉텅 떼어가면 나머지를 놓고 청년, 비정규직이 싸운다. 좁은문이 따로 없다. 이때 젊은 여성은 더블펀치를 맞는다. 1차로 청년이라 당하고 2차로 여자라서 당한다.

[곽인찬 칼럼] 일자리와 젠더동맹
/사진=뉴스1


일자리를 맨앞에 두면 젊은 남녀는 적이 아니라 동지여야 마땅하다. 서로 헐뜯고 싸우는 건 사치다. 손을 잡아도 될까말까다. 사생결단식 젠더 갈등은 을과 을이 싸우는 비극일 뿐이다.

민노총 같은 귀족노조에 대고 연공제 없애라고 백날 말해야 소용없다. 입만 아프다. 대신 정치를 바꾸는 게 빠르다. 정치인은 표 냄새를 맡는 데 귀신이다. 청년이 한목소리를 내면 귀를 기울이게 돼 있다. 4·7 보궐선거에서 20대는 본때를 보였다. 마침 내년 봄 대선이 열린다. 좋은 일자리를 내놓으라고 정치인들을 못살게 굴기에 딱 좋은 때다. 연공급제를 직무급제로 바꾸라고 압력을 넣어야 한다. 연공급제는 나이가 벼슬이지만 직무급제는 실력, 숙련도가 벼슬이다.
청년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공정과 통한다.

젠더 갈등의 원인이 어디 일자리뿐이겠는가. 다만 청년실업이 둘 사이를 갈라놓은 큰 원인 가운데 하나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기득권 노조를 상대로 한 일자리 투쟁에서 젠더 갈등은 자충수다. 일자리만큼은 갈등을 접고 청년동맹을 맺을 순 없을까.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