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할리우드 영화에서 여주인공은 대개 펌으로 부풀린 긴 머리를 하고 있다. 1950~1960년대 엘리자베스 테일러나 매릴린 먼로 등이 이를 통해 고전적 여성상을 보여줬다. 오드리 헵번은 이런 통념을 깼다. 그는 '로마의 휴일' '사브리나' 등 여러 편의 영화에서 선보인 숏컷 헤어스타일로 인종과 성별을 넘어 세계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른바 '헵번 스타일'이다.
숏컷 헤어스타일이 21세기 한국에서 생뚱맞게 핫 이슈가 됐다. 도쿄올림픽 양궁 3관왕 안산(20·광주여대)의 짧은 머리가 때아닌 '페미니스트 논란'을 불러일으키면서다. 지난주 몇몇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그의 헤어스타일을 트집 잡는 글들로 넘쳐났다. 일부 누리꾼은 그가 과거 SNS에서 남성 혐오적 어투를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웅앵웅, 얼레벌레 등 페미니스트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흔한 단어를 적시하면서다.
안 선수의 머리 스타일과 무심코 사용했을 법한 표현에 대한 과도한 공격이 이어지자 외신들도 주목했다.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영국 BBC 방송은 안산 선수가 "온라인 학대를 당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로이터통신도 "양궁 선수의 짧은 머리가 반페미니스트들을 자극했다"면서 젊은 한국 남성들의 반페미니즘 정서가 배경이라고 분석했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권리와 기회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적·정치적 운동·이론을 가리킨다. 이를 통해 남성 중심 사회에서 양성 평등을 향한 진전이 이뤄진 건 순기능이다.
반면 여성의 사회 참여가 활성화된 뉴밀레니엄 시대에 여성해방만 강조하다 보니 반페미니즘이란 역풍을 불렀을지도 모른다.
그런 맥락에서 페미니즘 대 반페미니즘 논쟁 자체는 변증법적 역사 발전과정의 일환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작금의 숏컷 시비가 이 범주에 들 리는 만무하다. 오죽하면 외신들이 이를 '사이버 불링'(가상공간 집단 괴롭힘)이라고 개탄했겠나. 우리 사회가 하루속히 젠더 극단주의에서 벗어나 여성할당제나 군 가산점 허용 여부 등의 이슈를 놓고 투명하고 건강한 토론을 벌였으면 좋겠다.
kby777@fnnews.com 구본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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