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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EU "탈레반과 대화… 여성 기본권 보장 전제돼야"

새로운 관계설정 고심
"정부로 인정하지 않지만
인도주의적 지원은 할 것"
캐나다 "공인 테러단체" 비난
독일·카타르, 공동성명 통해
"평화로운 권력 이양" 촉구

미국·EU "탈레반과 대화… 여성 기본권 보장 전제돼야"
탈레반의 손에 넘어간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17일(현지시간) 여성들이 얼굴을 드러낸 채 여성 인권 보장을 요구하는 팻말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이날 폭스뉴스는 아프간 타크하르주 탈로칸에서 얼굴과 전신을 가리는 이슬람 여성복 '부르카'를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 여성이 총살됐다고 전했다. 로이터뉴스1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탈레반과 새로운 관계 설정을 위해 고심하고 있다. 아직 서방세계와 동맹국중에선 탈레반을 공식 인정한 곳은 없다. 그렇지만 아프간 상황에 극도로 피로감을 느꼈던 각국은 일단 탈레반이 상식적으로 행동한다면 대화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탈레반도 일단 겉으로는 국제 기준에 맞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도이체벨레(DW) 방송에 따르면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의 호세프 보렐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는 17일(현지시간) 기자회견을 열고 "탈레반이 전쟁에서 이겼고 우리는 그들과 대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보렐은 "우리는 경계를 유지하면서 아프간에 실존하는 권력 기관들과 협상하겠지만 이는 탈레반을 아프간 정부로 정식 인정한다는 뜻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현지 여성과 소녀들을 보호하는 등 모든 것을 위해 탈레반과 대화해야 한다"며 연락을 유지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보렐은 "우리는 조건부로 아프간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고 인권 보호를 위해 우리가 가진 영향력을 활용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인도적인 지원은 계속하겠지만 아프간 개발원조 자금은 끊겠다며 탈레반이 이를 얻으려면 유엔 결의에 따라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고 밝혔다.

아프간 철군을 결정한 미국은 EU보다 좀 더 조심스럽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전보좌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탈레반을 정부로 인정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말했다. 그는 "이는 궁극적으로 탈레반이 전 세계에 그들이 어떤 세력이고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 보여주는 방향에 달렸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아프간 카불에서 미국인 철수를 위해 탈레반과 대화하고 있다며 탈레반쪽에서 공항까지 안전한 통행을 보장했다고 말했다. 프랭크 매캔지 미군 중부사령관은 같은날 발표에서 탈레반 고위급 인사들과 만나 미국인 철수를 방해하면 공격한다고 경고했다고 전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17일 소식통을 인용해 미 재무부가 미 은행에 예치중인 아프간 정부 자금을 동결했다고 보도했다.

미 백악관과 영국 총리실은 같은날 성명을 내고 주요7개국(G7) 정상들이 다음주 아프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화상으로 정상회의를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G7 국가 중 하나인 캐나다의 쥐스탱 트뤼도 총리는 탈레반을 향해 "정당하게 선출된 민주 정부를 무력으로 대체한 공인 테러 단체"라고 비난했다. 이날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셰이크 타밈 빈하마드 알타니 카타르 국왕은 아프간의 평화로운 권력 이양을 촉구하는 공동 성명을 내놨다.

하지만 아프간 내 정부군 잔존 세력과 탈레반에 반대하는 군벌들은 아프간 북동부 판지시르주에 집결해 결사항전을 다짐하고 있다. 이미 교전까지 일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정치매체 더내셔널뉴스와 인도 매체들은 이날 아프간 수도 카불 북동쪽으로 65km 떨어진 판지시르주에 저항군이 집결하고 있다고 전했다. 판지시르는 페르시아어로 '다섯 사자(Lions)'라는 의미로 아프간에서 가장 작은 주(州)인 동시에 높은 계곡에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다. 과거 소련은 소련·아프간 전쟁 당시 판지시르에 진입하려다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다.


현지 관계자들은 아프간 정부군 잔존 세력과 저항군이 아흐마드 마수드(32)를 따르기 위해 판지시르주로 모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마수드는 아프간 공화국의 국부이자 전쟁 영웅으로 불리는 아흐마드 샤 마수드의 아들이다. 판지시르주에서 태어난 아흐마드 샤 마수드는 1980년대 소련과 전쟁 당시 무장 게릴라였던 '무자헤딘'을 이끌고 싸웠으며 군벌들을 규합해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건국에 기여했다.

pjw@fnnews.com 박종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