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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관칼럼] 노근리 쌍굴다리의 역사 보존

[차관칼럼] 노근리 쌍굴다리의 역사 보존
충북 영동군 노근리 마을에서 영동읍으로 나오는 길목에 길이 약 25m, 폭이 7m 남짓한 작은 철도 교각이 있다. 1934년 경부선 철로 아래 건설된 이 교각은 2개의 아치 형태를 하고 있어 '쌍굴다리'라고 불린다. 흔히 볼 수 있는 철도 교각처럼 생겼지만 6·25 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죄 없는 양민들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했던 비극의 현장이다. 6·25 전쟁 발발 초기인 1950년 7월 25일, 영동군 주곡리와 임계리 주민 600여명은 미군 제1기병사단 예하 부대의 유도에 따라 피란길에 올랐다. 이튿날 피란 행렬이 쌍굴다리에 이르렀을 즈음 난데없이 미군의 폭격이 시작된다. 피난민 속에 북한군이 섞여있다고 오판한 것이다. 피난민들은 살기 위해 쌍굴다리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미군은 26일부터 무려 4일 동안 쌍굴다리를 포위하고 기관총까지 동원해 총알을 퍼부어 댔다. 무고한 피란민 250여명이 60시간을 갇혀 이유도 모른 채 무참하게 학살당하거나 다쳤다.

전쟁 후에도 이 사건은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노근리 사건의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이 사건을 세상에 알리고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주목을 끌지 못했다. 50여년이 지난 1999년 9월 AP통신이 이를 특종 보도하자 그해 10월 김대중 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의 진상규명 지시에 의해 한미 합동조사가 시작됐다.

마침내 2001년 1월 한미 합동조사 결과에 대한 공동발표가 나오고 클린턴 대통령이 '깊은 유감'을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2004년에는 '노근리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노근리 희생자들의 명예회복과 희생자 및 그 유족들에 대한 지원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게 됐다. 2011년에는 '노근리 평화공원'이 준공돼 많은 사람이 찾는 역사교육의 장이 됐다.

시대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쌍굴다리와 관련한 집단민원이 국민권익위에 제기되면서 쌍굴다리에 얽힌 가슴 저린 사연을 재차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쌍굴다리는 그 아래로 경부고속도로와 연결되는 도로가 지나다 보니 교통량이 많고 대형차량의 통행이 빈번하다. 이 도로의 선형이 굴곡지고 1차선으로 협소한 데다 우기 때 하천 범람으로 교통사고 위험이 커 주민들이 지속적으로 교통 불편을 호소해왔다. 이에 영동군은 쌍굴다리와 연결되는 도로를 2차선으로 확장하는 공사를 시행했으나 국가등록문화재인 쌍굴다리의 보존 문제로 공사가 중단됐다. 영동군과 국가철도공단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여러 방안을 찾았으나 사업 진행이 지지부진하게 되자 노근리 등 인근 3개 마을 주민들이 올 2월 국민권익위에 집단민원을 제기하게 된 것이다.

국민권익위는 8차례 이상의 현장조사와 관계기관 협의를 진행한 끝에 쌍굴다리 보존, 철도 안전, 마을주민 교통환경 개선이라는 문제를 한번에 풀 수 있는 조정안을 마련했다. 마침내 지난 7월 마을 주민들과 영동군, 국가철도공단, 문화재청이 조정안에 합의하면서 집단민원은 일단락됐다.
이는 단순히 민원을 해결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쌍굴다리는 지난 세기 겪었던 폭력과 대립의 상처를 우리가 잊지 않고 기억하게 해주는 공간이다. 비극적인 현대사의 현장이자 기억의 공간인 쌍굴다리를 지키고 보존하는 데 조금이나마 역할을 한 것 같아 참으로 다행스럽다.

이정희 국민권익위원회 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