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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 트라우마 딛고 외환시장 개방…'바이 코리아' 노린다

25년 전 트라우마 딛고 외환시장 개방…'바이 코리아' 노린다
환율이 1400원을 넘어선 지난해 9월 한국거래소 전광판. 2022.9.22/뉴스1


25년 전 트라우마 딛고 외환시장 개방…'바이 코리아' 노린다
(정부 제공)


25년 전 트라우마 딛고 외환시장 개방…'바이 코리아' 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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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 트라우마 딛고 외환시장 개방…'바이 코리아' 노린다
(자료사진) 2023.2.6/뉴스1


(서울=뉴스1) 김혜지 김유승 기자 = "외환위기 트라우마로 수십년을 유지한 낡고 좁은 도로(폐쇄적인 외환시장 구조), 이제 바꿀 때가 됐습니다."

정부가 이르면 내년부터 국내 외환시장을 해외 금융기관에 개방하기로 한 배경과 관련해 내놓은 설명이다. 지금처럼 폐쇄적이고 제한된 외환시장 구조가 오히려 시장 변동을 키우고 있다는 판단이 짙게 깔린 모습이다.

정부는 향후 외환시장 개방을 통해 되레 환율을 안정시키고 원화 표시 자산의 매력도를 높일 수 있다고 밝혔다.

증권계의 '선진국 클럽'인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선진지수 편입에도 한 발짝 가까워질 것이라고 평가했다.

정부는 7일 서울외환시장 운영협의회 세미나에서 '외환시장 구조 개선방안'을 발표했다. 방안의 핵심은 △해외 소재 외국 금융기관에 대한 국내 외환시장 개방 △국내 외환시장 개장시간 오전 2시까지 연장 △선진 수준 시장 인프라 구축 등이다.

특히 정부는 내년 하반기부터 일정 요건을 갖춰 인가를 받은 외국 금융기관(RFI)에 대해 우리 은행 간 외환시장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허용할 계획이다.

참여 허용 대상은 글로벌 은행·증권사 등으로 제한되며, 헤지펀드 등 단순 투기 목적 기관은 불허한다.

현재 원화는 역외 외환시장에서 거래가 불가한 반면 국내 외환시장은 정부 인가를 받은 국내 금융기관만이 직접 참여할 수 있다. 이에 외국 금융기관은 국내에 지점을 둔 경우나 국내 기관의 고객으로만 원화 거래가 가능하다.

전 세계 금융기관을 대상으로 24시간 거래를 열어놓은 선진국에 비해 폐쇄적인 모습이다.

한국은 소규모 개방경제라는 특성 탓에 본래도 폐쇄적인 외환시장 구조를 갖추고 있었지만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트라우마로 인해 시장 개방에 더욱 거부감을 비쳐 왔다. 외환위기는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위한 자본 자유화의 후폭풍이라는 인식이 상당했다.

정부는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외국환관리법을 제정한 이후 두 차례 전면 개정하면서 외환시장 자유화를 추진했다. 하지만 위기에서 얼마 벗어나지 않은 시점에 본질적으로 통제·관리 중심의 법 테두리를 바꾸진 못했다.

특히 외환시장 선진화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발발로 인해 시장 변동성이 커지면서 추진 동력의 상당 부분을 잃게 됐다. '환 변동이 커지면 위기가 찾아온다'는 외환위기 시절 트라우마가 다시 건드려진 탓이었다.

이승호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지난해 10월 보고서에서 "외국환거래법은 거래자유와 시장기능 활성화라는 도입 취지와 달리 지난 20여년간 암묵적인 외자 유출의 억제와 과도한 환율 변동성의 완화를 위한 조정·관리 방식으로 운영돼 왔다"며 "이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도 대외 불확실성의 지속으로 인해 불가피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이번 외환시장 구조 개선방안을 보면 정부의 자신감이 읽힌다. 실제로 당국자들은 이번 방안을 설명하면서 '자신감'과 '강한 개혁 의지'를 입에 담았다.

시장이 개방돼 해외 기관들의 원화 거래가 늘면 자본 유입이 많아질 수 있다. 물론 반대로 자본 유출이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한국 경제는 이런 변동을 감내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했다는 게 당국의 판단이다.

이런 자신감은 코로나19 위기 이후 환율 움직임이 뒷받침됐다. 당국에 따르면 외환위기 당시 원화 가치는 직전 대비 최대 -53.6%까지 절하됐고 금융위기 때에는 -34.9% 절하됐으나 작년에는 전년비 -17.4% 절하되면서 유로(-15.6%)·파운드(-21.0%)·엔(-23.4%)과 거의 같은 움직임을 보였다.

김성욱 기획재정부 국제경제관리관은 "20여년간 우리는 수많은 크고 작은 위기를 겪으며 충분한 경험과 역량을 쌓아왔다"며 "과거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한 걸음 나아가야할 때"라고 강조했다.

김 관리관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강화된 규제와 위험관리 노력 등으로 우리 대외 부문 취약성은 크게 완화됐다"면서 "강화된 거시 건전성을 바탕으로 팬데믹 당시 환율, 외화유동성 등 대외 부문은 과거 위기 대비 안정된 모습이었다"고 부연했다.

당국의 시장 모니터링도 기술적으로 발전했다고 보고 있다. 송대근 한국은행 외환업무부장은 "RFI가 국내 시장에 참여한다고 해서 모니터링 등에 차이가 있진 않다"며 "RFI는 국내 중개사를 통해서만 거래할 수 있고, 중개사는 거래 내역이 당국에 실시간 보고되며, RFI도 거래 이후 외환 전산망에 보고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출 예정"이라고 밝혔다.

오히려 나라 안팎으로 자본이 오가는 길을 넓히면 환율 변동성은 낮아질 것이라고 정부는 전망한다.

지금은 좁은 길 탓에 약간의 투기적 움직임만으로 환율 변동이 커지고 이에 따라 안정적 수익을 원하는 대형 기관 자금이 덜 들어오는 구조라면 앞으로는 시장 거래량이 늘고 다양한 성격의 참가자들이 나타나면서 오히려 환율 안정이 기대된다는 취지다.

김 관리관은 "그간 당국은 외환 변동성을 완화하기 위해 좁은 길을 고집해 왔는데 오히려 이것이 변동성을 더욱 높이는 측면이 있었다"며 "최소한 원화의 상대적 변동성 완화에는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지금은 시장 접근성이 낮아 밖에서 더 많은 돈이 들어올 수 있음에도 제약 요인이 있지만 (구조 개선 이후엔) 기업 실적 등 조건이 받쳐 준다면 안정적 자금이 장기적으로 더 유입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물론 부작용도 예상된다. 국내 금융기관의 경우 글로벌 기관의 외환시장 참가로 인해 경쟁사가 늘면서 영업 부담이 생길 수 있다.

이승우 한은 외환시장팀 과장은 "당장 국내 기관의 경우 글로벌 시장의 여러 기관과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기에 원화 영업에서의 경쟁력이라든가 고객 접점을 확보해야 한다"며 "그런 면에서 국내 은행의 전자거래 활성화 노력을 지원해 나가고자 한다"고 전했다.


당국의 구두개입·실개입 등 시장안정조치의 효과성이 떨어질 거란 우려도 나온다.

김 관리관은 "아예 국내 금융기관으로 구성된 시장과 외국 기관이 참여하는 시장 간 차이는 있을 수밖에 없고 비공식적이고 암묵적인 당국의 건의나 영향력에 일부 변화가 있을 것"이라면서도 "실질적인 모니터링 수준에 변화가 없다면 당국이 감내해야 하는 변화다. 어떤 나라도 외환시장이란 것은 시장에 의해 작동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