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함께한 고유의 술
세계인 입맛 잡을 수 있어
남는 쌀 이용 생산 늘려야
정황근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요즘 젊은 세대는 풍요로운 세상만큼이나 생활방식도 다양하고 문화적 감수성도 기성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독특함을 갖고 있는 듯하다. 자신감도 있고 창의적이다.
이런 젊은이들에게 아마도 가장 오래된 우리 문화유산의 하나일 것으로 여겨지는 막걸리가 관심을 받고 있어 흥미롭다. 젊은이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하여 만들어낸 막걸리가 우리 술 품평회에서 대상을 받고 시장에 안착하고 있으며 등산, 운동 후 가벼운 뒤풀이에 자연스럽게 막걸리가 등장한다. 60대 중반인 필자도 지인들과 라운딩을 할 때면 의례히 그늘 집의 막걸리가 기다려진다. 그러고 보니 막걸리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성인이면 즐기는 '국민주'라고 할 수 있겠다. 최근에는 외국인들도 한식에 곁들인 막걸리에 익숙하고 마트에서 막걸리를 구입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막걸리는 '방금 거른 술' '거칠게 거른 술'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는데 농경사회가 시작된 수천 년 전부터 우리 민족과 함께한 고유의 술이다. 힘든 농사일로 지친 심신을 풀어준 에너지원이자 동반자였다. 농촌에서 자란 기성세대라면 비슷한 경험들이 있겠지만 필자도 초등학교 시절에 막걸리를 처음 마셔봤다. 벼 수확이 한창이던 때에 집에서 2㎞ 정도 떨어져 있던 논에 새참으로 막걸리 심부름을 가던 도중 호기심에 주전자 뚜껑으로 홀짝홀짝 마시다가 논두렁에서 잠들어 버린 일이 있었다. 오랫동안 마을 어르신들의 놀림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막걸리는 쌀과 누룩, 물만 있으면 누구나 손쉽게 담글 수 있는 술이다. 어릴 때 어머니가 막걸리 빚는 모습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먼저 고두밥을 지어서 동네 기름집에서 얻어온 깻묵으로 만든 누룩가루를 섞고 치대어 반숙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방 안 항아리에 반죽과 물을 채워 넣고 담요를 씌워놓으면 며칠 후 요술처럼 '톡톡' 공기방울 터지는 소리와 함께 향긋하고 시큼한 술 내음이 났던 기억이 생생하다.
막걸리는 750㎖ 페트병이 대세이나 최근에는 유리, 캔 등 다양하고 소비자 가격도 1000원대부터 몇 만원까지 천차만별이다. 쌀 막걸리 한 병에는 보통 쌀 100~140g이 원료로 들어간다. 한국식품연구원 등의 분석에 따르면 막걸리에는 각종 아미노산과 미네랄, 비타민B군, 항산화 성분과 풍부한 유산균 등 유익한 물질이 다수 함유되어 있다. 적당히 마시면 피로 해소, 변비 개선, 피부 재생, 면역력 향상, 다이어트 등의 효과가 있다고 한다.
원래 우리나라는 국토는 좁지만 산과 강으로 지역이 나뉘어 있어서 각 지역 특산물을 활용한 다양한 가양주(家釀酒) 문화가 있었다. 일제의 억압과 만성적인 식량 부족으로 그 많던 가양주가 대부분 사라지고 종가와 사찰 중심으로 명맥만을 유지하다가 근래 뜻있는 분들의 노력으로 점차 복원되고 있어 퍽 다행으로 생각한다. 앞으로 다양한 전통주들이 옛 모습을 찾아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하기를 희망해 본다. 일본의 특산미를 이용한 지역별 다양한 사케의 성공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일본은 대표 전통주인 사케 생산에 연간 30만t 정도의 쌀을 소비한다고 한다. 우리나라 연간 막걸리 생산은 5천억원 규모로 5억병에 달한다. 약 4만t의 쌀이 사용되고 있는데 막걸리와 막걸리를 토대로 하는 동동주, 청주, 약주, 증류소주 등 우리 술의 품질 고급화와 수출산업화를 통해 연간 10만t 정도의 쌀은 얼마든지 우리 술 제조 원료로 쓸 수 있다고 본다.
그러면 매년 20만t 정도 남는 쌀 때문에 겪고 있는 여러 문제를 해소하는 데도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최근 들어 생맥주 수입량이 큰 폭으로 늘고 있다는데 요인은 생맥주를 캔에 담아 장기 유통이 가능하도록 한 기술에 있다고 본다. 우리 막걸리도 혁신적인 기술이 접목된다면 세계인들에게 얼마든지 사랑받을 수 있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젊은 스타트업을 포함한 식품기업들의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도전을 기대해 본다.
정황근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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