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붉은 기와, 흰 회벽, 푸른 타일… 도시 전체 ‘온화한 유산’ [옛 오스만 제국을 가다]

⑤제국의 일상, 사프란볼루 거리를 걷다

돌담·나무기둥 겹겹이 이어진 언덕의 도시
좁은 길 옆 기울어진 집들이 어깨 맞대고
소박하지만 생활의 지혜가 깃든 전통가옥
일상 곳곳 오스만 제국 기억 품고 있는 듯
창 너머 햇살에 반짝이는 ‘이즈니크 타일’
단순한 장식 너머 자연-인간 만나는 경계
"돌로 집 짓지만, 타일로 마음을 꾸밉니다"
오스만 미학의 본질 담은 장인의 한마디
질서와 평화가 깃든 사프란볼루의 일상들
전쟁으로 기억되는 제국의 인간적인 순간

붉은 기와, 흰 회벽, 푸른 타일… 도시 전체 ‘온화한 유산’ [옛 오스만 제국을 가다]
수세기 동안 카라반 무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튀르키예 북부 도시 사프란볼루는 전형적인 오스만 제국의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튀르키예문화관광부 제공

아나톨리아의 겨울이 막 끝난 3월, 산맥 사이로 길게 뻗은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달리면 전형적인 오스만 제국의 도시 사프란볼루(Safranbolu)가 모습을 드러낸다.

붉은 기와와 흰 회벽, 돌담과 나무기둥이 겹겹이 이어진 언덕의 도시. 멀리서 보면 단정한 조각품 같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수백 년의 세월이 배어 있는 생활의 향기가 묻어 난다.

사프란볼루의 건축은 지역 환경에 적응한 결과물이다. 겨울에는 눈이 자주 내리고 여름은 건조한 내륙기후 속에서, 건물은 햇빛과 바람의 각도를 계산해 세워졌다. 창문은 북쪽보다 남쪽으로, 골목은 바람의 흐름을 따라 비스듬히 나 있다. 그리고 어느 집을 방문해도 방바닥에는 카펫이 깔려 있고, 벽장 속에는 세대를 이어 내려온 커피잔이 보관되어 있다. 그 일상의 물건 하나하나가 제국의 기억을 품고 있었다.

붉은 기와, 흰 회벽, 푸른 타일… 도시 전체 ‘온화한 유산’ [옛 오스만 제국을 가다]
붉은 기와, 흰 회벽, 푸른 타일… 도시 전체 ‘온화한 유산’ [옛 오스만 제국을 가다]
사프란볼루의 오래된 가옥 '카이마캄라르 에비'. 과거 군사지휘관이 살던 곳으로, 1979년 튀르키예 문화부 지원에 따라 복원되어 박물관으로 개장했다.

■전형적인 오스만제국의 도시, 사프란볼루

골목 초입에서부터 발걸음은 느려진다. 좁은 길 양옆으로 기울어진 집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서 있다. 석재로 쌓은 1층 위에 나무 구조의 2층이 얹혀 있고, 그 위로 처마가 부드럽게 곡선을 그린다.

오스만의 전통가옥은 화려하지 않다. 그 대신 자연의 흐름과 인간의 삶을 잇는 방식으로 완성되었다. 석재는 대지와 연결되고, 나무는 숨을 쉬며, 빛은 집 안을 스며든다. 이곳에서 만난 장인들은 '건축이란 사람을 위한 옷'이라고 말하곤 한다. 곧 이곳의 건축물은 계절마다 열리고 닫히는 창문, 마당의 수돗가, 아래층의 창고와 위층의 거실 모두가 인간의 호흡에 맞춰 설계된 것이다.

사프란볼루의 오래된 가옥 '카이마캄라르 에비(Kaymakamlar Evi)'에 들어서자 목재 기둥에서 은은한 송진 향이 퍼졌다. 이 집은 19세기 초 사프란볼루 군사지휘관 하즈 메흐메트 에펜디의 거처로 지어진 뒤, 오랫동안 '카이마캄의 집'으로 불려왔다. 하층은 단단한 돌로, 상층은 목재와 흙벽돌로 이루어진 구조는 견고하면서도 유연하다. 못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짜 맞춘 전통 결구 방식 덕분에 세월의 무게에도 틀어짐이 없다.

집 안으로 들어서면 남성 손님을 맞는 셀람과 가족이 지내는 하렘이 층으로 나뉘어 있으며, 두 공간 사이에는 음식을 전달하던 회전식 식사창 '되네 돌랍(donme dolap)'이 남아 있다. 하층의 두꺼운 돌벽은 겨울의 냉기를 막고, 위층의 긴 처마와 창문은 여름의 열기를 위로 흘려보낸다. 계절마다 숨을 쉬는 집, 그것이 오스만 건축의 지혜였다.

벽과 천장은 손으로 그린 기하학 문양과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고, 목재 천장의 세밀한 조각은 장인의 손길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종교적 상징보다는 일상의 아름다움이 담긴 공간이지만, 질서와 절제가 배어 있는 분위기 속에는 신앙의 리듬이 살아 있었다. 신앙은 건축의 장식이 아니라 삶의 호흡이었다.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오래된 창문 너머로 회청색 타일 조각이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이즈니크(Iznik) 타일이다. 오스만 건축의 정점으로 불리는 이 타일은 페르시아의 유약 기술과 중국 청화자기의 색감이 이즈니크 지역(튀르키예 북서부 부르사주의 도시)에서 융합되며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오스만의 장인들은 그 기법을 단순히 모방하지 않았다. 그들은 흙과 물, 불의 온도를 조절하며 타일을 하나의 신앙적 언어로 승화시켰다. 파란색은 하늘과 신성, 초록은 생명과 평화, 붉은색은 인간의 열정을 상징했다.

이즈니크 타일은 모스크의 미흐라브와 돔, 궁전의 내벽을 장식했지만 사프란볼루의 상류층 가옥에서도 창문 테두리나 기둥 장식에 일부 사용되었다. 햇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는 타일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자연의 조화와 인간의 손길이 만나는 경계였다.

붉은 기와, 흰 회벽, 푸른 타일… 도시 전체 ‘온화한 유산’ [옛 오스만 제국을 가다]
블루모스크 내부의 이즈니크 타일

■튀르키예 장인이 빚어낸 이즈니크 타일

사프란볼루의 골목 어귀에서 만난 한 장인은 말했다. "우리는 돌로 집을 짓지만, 타일로 마음을 꾸밉니다." 그 한마디에 오스만 미학의 본질이 담겨 있었다. 타일은 눈에 보이는 무늬이자, 인간이 신의 질서를 닮아가려는 시도의 흔적이었다.

다시 한참을 걷다 보면, 집들이 끝나는 언덕 위에서 도시 전체가 내려다보인다. 붉은 지붕이 겹겹이 이어지고, 그 사이로 하얀 벽이 리듬처럼 이어진다.

멀리 모스크의 미너렛(모스크의 부수 건물)이 솟아 있고, 저녁빛이 기와 위에 부드럽게 내려앉는다. 이곳의 집들은 거대한 제국의 한복판에서 태어났지만 그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전쟁의 제국이 아닌 일상의 제국. 오스만의 진짜 힘은 궁전이 아니라 이런 평범한 일상의 집들 속에서 길러졌다.

이제 시간이 늦어 골목마다 불빛이 켜진다. 현관 앞에 걸린 황동등이 흔들리고, 집 안에서는 저녁기도의 아잔(예배시간 공지)이 울린다.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 주전자에서 피어오르는 홍차 향, 그리고 나무문이 닫히는 소리가 어우러진다. 오스만의 집은 이렇게 하루를 마무리한다. 화려하지 않지만 질서와 평화가 깃든 일상. 그것이 바로 제국이 가장 인간적이었던 순간이다.

전쟁과 정복으로 기억되는 제국이지만, 그 근간에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기술'이 있었다.
곧 오스만의 건축은 단순한 미학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 신의 질서를 조화시키는 생활의 철학이었다. 그리고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사프란볼루의 골목마다 그 철학이 숨 쉬고 있다. 바람이 스치는 목재 벽, 물이 흐르는 정원, 그리고 이즈니크 타일에 반사된 빛의 파동. 그 모든 것은 제국이 남긴 가장 온화한 유산이다.

붉은 기와, 흰 회벽, 푸른 타일… 도시 전체 ‘온화한 유산’ [옛 오스만 제국을 가다]

양우진 한국외대 국제관계학 박사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