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혜진 도쿄특파원
파란색 등하교 모자를 쓴 초등학생 수십 명이 무리를 지어 기념관 곳곳을 둘러본다. 목화에서 실이 뽑히는 과정과 방직기계에서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며 섬유가 제작되는 과정을 반짝이는 눈으로 관찰하며 '워크시트'에 연필로 바쁘게 적어 내려간다. 과학자의 눈으로 산업의 세계를 탐험하듯 움직이는 모습은 '자동차의 나라' 일본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지난주 금요일 오전 방문한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시의 도요타산업기술기념관은 단순한 전시장이 아닌, 일본 산업의 뿌리를 체험하며 배우는 교육 현장이었다. 연간 140만명이 찾는다는 이곳은 이날도 초등학생 단체 견학팀과 일본 내국인, 외국인 등으로 북적였다. 오호라 가즈히코 도요타산업기술기념관 관장은 "올해는 방문객이 역대 최고를 기록할 것 같다"며 미소를 지었다.
1926년 도요타 자동직기제작소 설립지에 세워진 이곳은 일본 제조업의 역사와 철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일본의 주요 산업이었던 섬유산업 기술이 자동차 생산 기술로 연결되는 흐름이 생생하게 전시돼 있다. 방직기 한 대에서 출발한 작은 기술이 자동차 제국을 일으킨 근본이 되었음을 기념관은 묵묵히 증언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 초등학교 5학년 교과 과정 중 '자동차 제조업' 단원과 연계해 학습 프로그램을 제작해 운영하고 있다는 설명이 귀를 사로잡았다. 3~4시간 동안 기념관 설명, 연구주제 설정, 시설 견학, 주제별 탐구활동, 견학 결과 발표 등이 진행된다. 학생들에게 워크시트, 사전·사후 수업용 자료, 전시 설명 영상 등 학습자료도 제공된다. 체험존에서는 섬유기계·자동차 관련 원리와 메커니즘을 놀이처럼 경험할 수 있다.
도요타그룹이 중시하는 모노즈쿠리(최고 제품을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장인정신과 제조 문화) 정신이 공간과 교육 속에 가득 녹아 있는 셈이다.
이날 도요타산업기술박물관을 나오며 '산업 DNA'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부터 산업기술을 친숙하게 접하는 환경, 그것이 일본 제조업의 뿌리 깊은 경쟁력의 비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도요타그룹 신입사원 환영회에서는 "초등학교 때 도요타산업기술기념관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모노즈쿠리'에 대한 열정을 키우기 위해 입사했다"고 밝히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이런 '산업 DNA'는 위기의 순간에 더욱 빛을 발한다. 특히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전쟁이 첨예한 지금 상황에서 더욱 그렇다. 산업역량이 내재화된 기업일수록 기술고도화 및 선도기업 추격에서 유의미하게 더 높은 성과를 보인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일본의 사례는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떤 산업의 꿈을 심어주고 있는가.
한국에서도 '메이커 교육' '산업체험학습'이란 이름으로 비슷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일회성 체험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교과서의 지식은 풍부하지만 산업의 논리를 몸으로 익히는 기회는 부족하다. 산업 DNA는 단순히 생산량이 아니라 기술과 숙련이 세대 간 전승되는 문화적·교육적 기반에서 확인된다. 전체적으로 인재 양성과 산업 생태계가 맞물릴 때 위기에 강한 산업구조가 형성된다.
일본 기업들이 트럼프 관세전쟁에 대응해 자동화·로봇 투자, 소재·부품·장비 분야에서 선도적 성과를 내고 있는 것도 이러한 배경과 무관치 않다.
위기의 순간에 더욱 빛나는 것은, 단기가 아닌 '세대와 세대를 잇는 문화'다.
한국이 진정한 제조강국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산업을 교실 밖으로 끌어내어 아이들의 손끝에서 살아 숨 쉬게 해야 한다. 도요타의 방직기에서 시작된 산업 DNA처럼 우리도 '만드는 힘'을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문화적 토양을 만들어야 할 때다.
sjmary@fnnews.com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