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예전에 해군 훈련을 받을 때 발가락을 꼼지락거려서 혈액 순환을 시키는 것을 배운 게 도움이 됐다.” 찰스 3세 영국 국왕의 대관식에서 무게 3.6kg에 달하는 보검을 흔들림 없이 들고 꼿꼿이 서 있는 모습을 보여 화제가 된 영국의 여성 정치인이 자신의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었던 비결을 털어놓았다. 보검을 들고 있었던 주인공인 페니 모돈트 의원은 11일(현지시간) BBC 팟캐스트 인터뷰에서 대관식 때 51분간 무거운 ‘국가의 검(Sword of State)’을 들고 서 있던 상황을 회상했다. 그는 대관식 당시 국가 자문기구인 추밀원 의장 자격으로 해당 검을 찰스 국왕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17세기 찰스 2세를 위해 제작된 ‘국가의 검’을 들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입장해서 거의 1시간을 정확한 각도로 들고 있다가 이후에 가벼운 ‘헌납의 검’으로 바꿔 들었다. 모돈트 의원은 “대관식 전 6개월간 체육관에 간 적이 없다”며 “다만 대관식 전에 진통제를 두 알 먹었다”고 말했다. 모돈트 의원은 아울러 “예전에 해군 훈련을 받을 때 발가락을 꼼지락거려서 혈액 순환을 시키는 것을 배운 게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따라 해보려는 사람들에겐 연습하고, 아침을 든든히 챙겨 먹고, 편안한 신발을 신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모돈트 의원이 들고 있던 보검은 길이 약 121㎝, 무게 약 3.6㎏에 이른다. 이 검의 칼자루는 다이아몬드, 루비, 에메랄드 등으로 장식돼 있고 칼집에는 장미, 엉겅퀴, 토끼풀 등의 모양으로 된 장식이 있다. 왕이 이 검을 전달받는 것은 자신의 의무와 기사로서의 덕목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대관식 후 모돈트 의원은 ‘씬 스틸러’로 추켜세워졌고 소셜미디어에는 그의 모습으로 만든 밈이 넘쳐났다. sanghoon3197@fnnews.com 박상훈 기자
2023-05-12 13:44:46[파이낸셜뉴스] 70년 만에 열린 영국 국왕의 대관식에서 한 여성 정치인이 '뜻밖의 스타'로 떠올랐다. 보수당 하원 원내 대표인 페니 모던트(50) 추밀원 의장이다. 지난 6일(현지시간) 찰스 3세 영국 국왕의 대관식에서 모던트 의장은 왕을 상징하는 보검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금색 고사리가 수놓아진 청록색 원피스 차림으로 등장해 1시간이 넘는 행사 내내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보검을 들고 있었다. 이 보검은 지난 1821년 조지 4세의 대관식 때 만들어진 것으로 왕의 권력과 선악을 판단하는 능력을 상징한다. 검에는 다이아몬드, 루비, 에메랄드 등 각종 보석이 박혀있으며 길이는 121cm, 무게 약 3.6kg이다. 왕이 이 검을 전달받는 것은 자신의 의무와 기사로서의 덕목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여성이 보검 전달 역할을 맡은 건 영국 역사상 처음이다. 모던트 의장은 행사에 앞서 한 팟캐스트 방송에서 “검을 들고 다니는 역할에 대비하기 위해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보검 모형을 들고 리허설을 했다고 밝혔다. 모던트 의장은 “큰 검을 들고 왕 주위에 서있는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책임감을 느낀다”라고 강조했다. 모던트 의장은 지난 2010년 정치에 입문해 2017년 국제개발부 장관, 2018년 여성 및 평등부 장관을 지냈다. 2019년에는 영국 최초의 여성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지난해 보수당 대표 경선에서 리시 수낙 현 총리와 경쟁했던 유력 후보 중 한 명이다. 그는 대관식 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대관식에 참석하게 돼 영광"이라며 "군인과 경찰관은 안전을 위해 몇 시간 동안 걷거나 서 있는다. 그에 비해 제 일은 오히려 쉬웠다”라고 전했다. yuhyun12@fnnews.com 조유현 기자
2023-05-08 06:28:28[파이낸셜뉴스] "...(중략)...이에 승선 이세통, 내시 이당주, 어사 잡단 김기신, 사천감 김자기, 태사령 허자단 등 모든 호종(扈從)한 문관(文官) 및 대소신료(大小臣僚) 환시(宦寺)가 모두 해(害)를 만나매, 쌓인 시체가 산(山)과 같았다. 처음에 정중부, 이의방 등이 약속하기를 우리들은 오른 소매를 빼고 복두(頭)를 벗을 것이니 그렇지 않은 자는 다 죽여라라고 하였으므로 무인(武人)으로서 복두를 벗지 않은 자 또한 많이 피살(被殺)되었다. 왕이 크게 두려워하여 그 뜻을 위로하고자 제장(諸將)에게 칼을 하사하니, 무신(武臣)들이 더욱 교만해져서 횡포하였다 " -고려사절요 中 10세기 이후 '문치주의'(文治主義)를 근간으로 하는 고려 사회를 뿌리채 뒤흔드는 정변이 발생했다. 당시 정3품 상장군(上將軍)인 정중부와 견룡행수(牽龍行首) 이의방, 이고 등을 중심으로 한 무신들이 조정의 문무(文武) 요직을 장악하고 경제력마저 독점하고 있던 문신들을 왕 앞에서 대거 척살(刺殺)했다. 그동안 중앙정치 무대에서 소외되고 문신들의 등쌀에 온갖 수모를 당했던 무신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정변을 단행한 것이다. 무신정변 이후 고려 사회는 100년에 이르는 엄혹한 '무신집권기'에 들어갔다. 정제되지 못하고 거칠었던 무신 세력들은 힘으로 모든 상황을 통제하려 했고 왕권을 유린(蹂躪)했으며 상호 간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이기 일쑤였다. 이에 따라 무신집권기 동안 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최고 권력자는 계속 바뀌면서 고려 사회는 좀처럼 혼란의 도가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문신들의 씨를 말리며 고려 사회의 근간을 뒤흔들었던 '무신정변' 전말을 되돌아봤다. ■고려 사회의 문치주의 태조 왕건(王建)이 고려를 건국 할 때 그 주변에는 건국에 일조한 수많은 무신들이 있었다. 이들은 이른바 '공신'(功臣) 세력을 형성해 갓 태어난 고려 왕조의 중심에 위치했다. 심지어 2대 왕 혜종(惠宗)과 3대 왕 정종(定宗) 교체기에 무신들이 대거 동원돼 정치적 변화를 주도하며 그 영향력을 입증하기도 했다. 그러나 4대 왕인 광종(光宗) 대에 이르러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비대해진 무신들의 영향력을 제어하기 위해, 중앙정치 무대에서 무신들을 배제하고 문신들을 대거 등용하거나 요직에 앉혔다. 문신들의 대표적인 정계진출 통로인 '과거제'(科擧制)도 이 때 처음 시행됐다. 이로써 '문치주의'(文治主義)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후 조정에서 문신들은 비단 자신들 본연의 영역에만 있는 것이 아닌 무신들의 영역도 잠식(蠶食)했다. 고려 시대 군사를 맡아보던 관청인 병부(兵符)의 고위직도 문신들이 차지했다. 기실 외침이나 내란을 평정하면서 유명해진 강감찬, 윤관, 서희 등도 모두 무신이 아닌 문신들이었다. 문무의 양권을 손에 쥔 문신들은 경제력도 독점해나갔다. 문신들은 대외 무역 등을 통해 부를 계속 축적했고, 심지어 백성들의 토지를 마음대로 갈취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토지를 빼앗겨 '유리걸식'(流離乞食)하는 백성들이 급격히 증가했다. ■무신들의 수모와 거사 모의 문신들의 전성기는 무신들에게는 '재앙'(災殃)과도 같았다. 우선 문무를 넘나들며 요직을 꿰찼던 문신들과 달리 무신들은 정2품 이상의 관직은 감히 넘볼 수도 없었다. 정3품 상장군이 무신들이 올라갈 수 있었던 관직의 최대치였다. 더욱이 과거제인 문과(文科)를 통해 정식으로 등용되는 문신들과 달리 무신들은 이와 비슷한 무과(武科)도 없어 태생적인 한계를 노정(露呈)할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왕이 궁궐 밖으로 나가 문신들과 연회를 할 때, 무신들은 여기에 결코 참여하지 못했고 그저 호위병의 역할만 수행해야 했다. 그나마 최고 관직이었던 상장군도 이 역할에 그쳤다. 특히, 당시 고려의 18대 왕이었던 의종(毅宗)은 주색(酒色)을 밝혀 시도 때도 없이 연회를 열며 무신들을 호위병으로 부렸다. 상황이 이렇자 당시 무신들과 그들의 중심 인물이었던 상장군 정중부, 견룡행수(牽龍行首) 이의방, 이고 등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결국 이들은 거사를 모의하기에 이른다. 1170년 4월, 의종이 화평재(和平齋)로 행차했을 때 경치 좋은 곳에 다다르자 문신들과 또 다시 연회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 때도 무신들은 상장군부터 일개 병사 할 것 없이 호위병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정중부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 이의방과 이고는 뒤쫓아가 정중부에게 거사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피력했다. 문신들은 밤새 마시고 배불리 먹고 있는데, 무신들은 굶주리고 피곤한 세월이 계속되고 있으니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중부도 이 주장에 적지 않게 공감했다. 정중부 본인도 이전에 문신인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으로부터 수염이 촛불로 태워지는 수모를 당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정중부는 일단 상황을 좀 더 지켜보고 숙고(熟考)하자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무신정변 화평재 행차 이후에도 의종의 사치스러운 연회는 자주 열렸고, 문신들의 오만함과 무신들의 수모는 계속됐다. 이전과 비교해 상황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의종의 총애에 기대 함부로 나대는 환관 한뢰와 임종식 등의 '안하무인'(眼下無人)적인 행태는 더욱 심화됐다. 결국, 1170년 8월에 정중부는 이의방, 이고 등을 불러 거사를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거사 당일 의종은 개경의 덕적산 남쪽에 있는 흥왕사(興王寺)로 행차했다. 정중부와 이의방 등은 의종이 흥왕사에서 궁궐로 바로 환궁한다면 일단 거사를 미루겠지만, 만약 보현원(普賢院)으로 이동한다면 그 곳에서 거사를 단행하기로 합의했다. 고려의 운명의 여신은 후자를 택했다. 의종은 보현원으로 이동하기로 했고, 오문(五門) 앞에 이르러 갑자기 무신들로 하여금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戱)를 하라고 명했다. 오병수박희는 무신들 간에 무예를 겨루는 대회였다. 물론 문신들은 의종과 함께 술을 마시며 이를 즐겁게 관전할 것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해야 할까. 바로 이 자리에서 사실상 무신정변의 직접적인 도화선(導火線)이 되는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대장군이었던 이소응이 오병수박희에 참가했는데, 이소응이 대회 도중 힘에 부쳐 뒤돌아섰을 때 환관인 한뢰가 그 앞에 나와 패기가 없다며 노장군의 뺨을 후려쳤다. 물리적인 충격으로 이소응은 섬돌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자 의종과 문신들은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임계점(臨界點)을 넘어선 무신들은 당장이라도 칼을 뽑으려고 했지만, 정중부는 일단 눈짓으로 말리고 한뢰 앞으로 가서 "정3품 벼슬인 이소응에게 너 같은 사람이 모욕을 주느냐"며 크게 꾸짖었다. 이에 놀란 의종이 직접 정중부를 진정시키며 오병수박희에서의 상황은 종료됐다. 하지만, 이제 주사위는 던져 진 셈이었다. 저녁 무렵 의종이 보현원에 이르자 마침내 이의방과 이고는 행동에 들어갔다. 그들은 우선 왕명이라고 기만하며 순검군(巡檢軍)을 집합시켰다. 의종이 보현원 내부로 들어간 후 나머지 신료들이 각자의 처소로 물러나려 할 때, 순검군을 동원한 이의방과 이고는 그 자리에서 임종식과 이복기 등 신료들을 대거 척살했다. 이를 본 한뢰는 곧바로 보현원 내부의 의종에게 달려가 왕의 침상 아래로 숨었다. 의종이 보현원 내부로 진입한 무신들을 막으려 했지만, 무신들은 한뢰를 내놓을 것을 의종에게 요구했다. 의종의 용포(龍袍)를 잡고 버티던 한뢰는 이고가 휘두른 칼에 즉사했다. 이에 의종 곁에 있던 문신들이 감히 왕 앞에서 무력을 행사한다며 책망하자, 더욱 격분한 무신들은 "문신의 관(冠)을 쓴 자는 비록 서리(胥吏)일지라도 씨를 남기지 말라"고 외치며 의종 곁에 있던 문신들을 모조리 척살했다. 보현원에서의 거사가 성공하자 이의방, 이고 등은 곧바로 개경으로 쳐들어갔다. 무신들은 죄인 등을 다스리는 관청인 가구소(街衢所)에 있던 별감(別監) 김수장을 죽였고, 궁궐에 있던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양순정, 판이부사(判吏部事) 허홍재를 비롯해 수많은 관료들을 척살했다. 뒤이어 의종과 태자를 폐위했고 의종의 둘째 동생인 익양공(翼陽公) 호(晧)를 즉위시켰는데, 이가 바로 고려의 제19대 왕인 명종(明宗)이다. 이로써 정중부와 이의방, 이고 등이 중심이 된 무신정변은 성공했고, 약 100년에 이르는 엄혹한 무신집권기가 시작됐다. ■100년 무신집권기 무신들이 권력을 잡은 후 왕정(王政)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한 반(反) 무신 항쟁이 일어났다. 1173년에 동북면병마사 김보당과 그 이듬해에 서경유수 조위총이 일으킨 항쟁이 그것이다. 또한 사찰 승려들이 무신정권에 대항해 항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항쟁들은 이의방의 부하인 이의민 등의 활약으로 진압됐다. 100년에 이르는 무신집권기의 특징은 왕권의 '유명무실'(有名無實)과 집권한 무신이 중방(최고 무신들로 구성된 회의 기구), 도방(경대승이 설치한 사병집단이자 숙위기관), 교정도감(최충헌이 설치한 최고 권력 기구), 정방(최우가 설치한 인사담당 기관) 등과 같은 기구를 통해 모든 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최고 권력자들이 자주 교체됐다. 무신집권기 초반의 최고 권력자는 정변 당시 견룡행수였던 이의방이다. (참고로 이의방의 동생인 이린은 조선의 건국자인 태조 이성계의 6대 조였다.) 이의방은 정변 동지였던 이고 등을 죽이고 정중부를 밀어낸 후 권력을 장악했다. 이의방은 자신의 딸을 명종에게 시집 보내는 등 국정을 마음대로 주물렀다. 하지만 정중부의 아들인 정균의 계략에 걸려들어 피살됐고, 이후 정중부가 권력을 장악했다. 이의방 시대와 다를 바 없이 정중부 시대에도 정중부 자신과 그 아들들의 국정 농단 등이 횡행했다. 이에 청년 장군이었던 경대승이 등장해 정중부와 정균 등을 기습해 척살한 후 권력을 잡았다. 다만, 경대승의 경우는 이의방, 정중부와 달랐다. 경대승의 거사 이유는 왕권을 유린한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을 제거하는 것이었고, 실제로 권력을 잡은 후 경대승은 왕권을 어느 정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의종을 죽인 이의민을 끝까지 찾아내 척결하려는 의지를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경대승 역시 신변의 위협을 느꼈고, 끝내 젊은 나이에 요절(夭折)했다. 경대승이 죽자 이번에는 변방에서 숨죽이고 있던 이의민이 나타나 권력을 장악했다. 이의민 역시 자신의 상관이었던 이의방처럼 '전횡'(專橫)을 일삼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의민과 그 아들들의 전횡을 참지 못한 최충헌, 최충수가 거사를 일으켰고, 이의민 등을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최충헌은 이전 권력자들과 달리 무려 4대(최충헌-최우-최항-최의) 62년(1196년~1258년)에 걸쳐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른바 '최씨 무신정권'의 시대를 연 것이다. 최충헌은 비단 무신 뿐만 아니라 문신들도 고루 등용해 자신의 세력 기반을 공고히 했다. 또한 명종과 희종(熙宗) 등 왕을 마음대로 '폐립'(廢立)하기도 했다. 최충헌의 뒤를 이은 아들 최우 등은 강화도에서 대몽(對蒙) 항쟁을 주도했다. 최씨 무신정권은 최의 대에 이르러 종말을 고했고, 이후 김준과 임연, 임유무 부자가 잇따라 권력을 잡았다. 임유무는 대몽 항쟁 당시 친몽파인 원종(元宗)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려 하자 이를 저지하다 원종에 의해 제거됐다. 임유무를 끝으로 비로소 길고 엄혹했던 무신집권기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고, 1270년 드디어 왕정이 복고됐다. kschoi@fnnews.com 최경식 기자
2021-06-19 01:19:02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가 오는 10월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를 앞두고 갑작스레 의회를 멈추면서 정치권 안팎에서 격렬한 비난 여론이 쏟아졌다. 총리 반대파들은 여당이 협상 없는(노딜) 브렉시트를 밀어붙이기 위해 의회를 마비시켰다고 주장했으나 총리측은 브렉시트에 앞서 민생 법안들을 서둘러 처리하기 위해 의회 일정을 조정했을 뿐이라며 브렉시트에 대해 논의할 시간은 아직 충분하다고 밝혔다. 현지 언론들에 따르면 영국 왕실의 자문기구인 추밀원은 28일(현지시간) 의회의 현재 회기를 종료하고 새로운 회기를 시작하도록 승인한다고 밝혔다. 앞서 브렉시트 강경파로 유명한 제이컵 리스 모그 하원 원내 총무는 휴가 중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스코틀랜드 별장에 찾아가 허가를 얻어냈다.■브렉시트 논의 시간 2주 줄어영국 의회는 보통 1년 단위로 진행되며 1개 회기중에 4번을 쉰다. 현재 영국 하원은 여름 휴회 중이며 9월 3일에 다시 열릴 예정이었다. 하원의원들은 기존 계획대로 움직인다면 9월 3일에 등원해 같은달 12일까지 약 2주간 의정활동을 하다가 10월 8일까지 전당대회 휴회로 다시 쉬고, 10월 9일부터 안건을 처리한다. 10월 17~18일에는 브렉시트를 앞두고 EU 정상들의 마지막 회의가 열리며 영국은 10월 31일에 EU를 탈퇴한다. 날짜를 따지면 하원의원들은 앞으로 브렉시트 전까지 약 5주간 브렉시트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그러나 존슨 총리는 28일에 여왕에게서 오는 10월 14일 '여왕 연설'을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영국에서는 의회의 새 회기가 시작될 때마다 왕이 출석해 국정 연설을 하며 의회는 연설에 앞서 일정기간 정지된다. 이번 조치에 따라 영국 의회는 오는 이달 9~12일 사이 정회되면서 현재 회기를 끝내고 10월 14일 연설을 계기로 새로운 회기를 시작한다. 회기가 바뀌면 전기에 미결된 모든 법안은 폐기되며 이를 처리하려면 다시 상정해야 한다. 존슨 총리는 28일 하원 의원에 돌린 공지문에서 현재 회기가 340일을 넘겨 400년 의회 역사상 최장 기간 지속됐다며 당장 해결해야할 보건, 치안, 사회기반시설 관련 법안들이 쌓여있지만 처리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요한 법안 처리를 브렉시트까지 기다릴 수 없다며 의회를 재 시작해 법안들을 다시 상정하겠다고 강조했다. 이번 조치에 따라 하원에서 브렉시트를 논의할 수 있는 시간은 3주도 채 남지 않게 됐다.마이클 고브 영국 국무조정실장은 BBC와 인터뷰에서 이번 조치가 의회의 브렉시트 논의를 방해하려는 정치적 시도냐는 질문에 "절대로 아니다"라고 답했다. 그는 "존슨 총리는 급한 민생 현안을 처리하기 위해 회기를 다시 시작하길 원하며 의원들에게는 다음주 복귀(9월 3일) 이후 브렉시트를 논의할 시간이 충분하다"고 말했다.■'쿠데타 멈춰'시위…야권 존슨 저지그러나 이날 제 1야당인 노동당의 제러미 코빈 대표는 "의회를 정지시키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으며 총리가 벌이는 짓은 민주주의를 강탈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브렉시트에 회의적인 스코틀랜드의 니콜라 스터전 자치수반 겸 스코틀랜드국민당 대표는 의회를 정지시킨 총리의 행위가 "독재"라며 의원들이 다음주에 총리를 막지 못한다면 "오늘은 영국 민주주의 어두운 역사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평소에 정치 중립을 표방하던 존 버커우 하원의장은 "나는 정부에서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지만 만약 의회 정회가 사실이라면 이는 헌법적으로 포악한 행위"라고 지적했다. 지난 7월 존슨 정부 출범과 함께 물러난 필립 해먼드 전 재무장관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의회가 정부를 뒷받침하지 못하면 이는 헌법 유린이다"고 밝혔다.이날 정회 소식이 알려지자 런던 총리 관저 앞에는 수백명의 시위대가 몰려나와 "쿠데타를 멈춰라"고 외치며 EU 깃발을 흔들었다. 주요 대도시에서도 수천명의 시위대가 운집했으며 영국 의회 사이트에 올라온 정회 반대 청원에는 100만명이 넘는 참여자가 모였다. 노동당 측은 3일 하원이 다시 열리면 즉시 불신임 투표 논의를 시작할 예정이나 보수당 내 반란표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를 강행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pjw@fnnews.com 박종원 기자
2019-08-29 17:46:24[파이낸셜뉴스]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가 오는 10월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를 앞두고 갑작스레 의회를 멈추면서 정치권 안팎에서 격렬한 비난 여론이 쏟아졌다. 총리 반대파들은 여당이 협상 없는(노딜) 브렉시트를 밀어붙이기 위해 의회를 마비시켰다고 주장했으나 총리측은 브렉시트에 앞서 민생 법안들을 서둘러 처리하기 위해 의회 일정을 조정했을 뿐이라며 브렉시트에 대해 논의할 시간은 아직 충분하다고 밝혔다. 현지 언론들에 따르면 영국 왕실의 자문기구인 추밀원은 28일(현지시간) 의회의 현재 회기를 종료하고 새로운 회기를 시작하도록 승인한다고 밝혔다. 앞서 브렉시트 강경파로 유명한 제이콥 리스 모그 하원 원내 총무는 휴가 중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스코틀랜드 별장에 찾아가 허가를 얻어냈다. ■브렉시트 논의 시간 2주 줄어 영국 의회는 보통 1년 단위로 진행되며 1개 회기중에 4번을 쉰다. 현재 영국 하원은 여름 휴회 중이며 9월 3일에 다시 열릴 예정이었다. 하원의원들은 기존 계획대로 움직인다면 9월 3일에 등원해 같은달 12일까지 약 2주간 의정활동을 하다가 10월 8일까지 전당대회 휴회로 다시 쉬고, 10월 9일부터 안건을 처리한다. 10월 17~18일에는 브렉시트를 앞두고 EU 정상들의 마지막 회의가 열리며 영국은 10월 31일에 EU를 탈퇴한다. 날짜를 따지면 하원의원들은 앞으로 브렉시트 전까지 약 5주간 브렉시트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 그러나 존슨 총리는 28일에 여왕에게서 오는 10월 14일 '여왕 연설'을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영국에서는 의회의 새 회기가 시작될 때마다 왕이 출석해 국정 연설을 하며 의회는 연설에 앞서 일정기간 정지된다. 이번 조치에 따라 영국 의회는 오는 이달 9~12일 사이 정회되면서 현재 회기를 끝내고 10월 14일 연설을 계기로 새로운 회기를 시작한다. 회기가 바뀌면 전기에 미결된 모든 법안은 폐기되며 이를 처리하려면 다시 상정해야 한다. 존슨 총리는 28일 하원 의원에 돌린 공지문에서 현재 회기가 340일을 넘겨 400년 의회 역사상 최장 기간 지속됐다며 당장 해결해야할 보건, 치안, 사회기반시설 관련 법안들이 쌓여있지만 처리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요한 법안 처리를 브렉시트까지 기다릴 수 없다며 의회를 재 시작해 법안들을 다시 상정하겠다고 강조했다. 이번 조치에 따라 하원에서 브렉시트를 논의할 수 있는 시간은 3주도 채 남지 않게 됐다. 마이클 고브 영국 국무조정실장은 BBC와 인터뷰에서 이번 조치가 의회의 브렉시트 논의를 방해하려는 정치적 시도냐는 질문에 "절대로 아니다"라고 답했다. 그는 "존슨 총리는 급한 민생 현안을 처리하기 위해 회기를 다시 시작하길 원하며 의원들에게는 다음주 복귀(9월 3일) 이후 브렉시트를 논의할 시간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쿠데타 멈춰'시위...야권 존슨 저지 그러나 이날 제 1야당인 노동당의 제러미 코빈 대표는 "의회를 정지시키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으며 총리가 벌이는 짓은 민주주의를 강탈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브렉시트에 회의적인 스코틀랜드의 니콜라 스터전 자치수반 겸 스코틀랜드국민당 대표는 의회를 정지시킨 총리의 행위가 "독재"라며 의원들이 다음주에 총리를 막지 못한다면 "오늘은 영국 민주주의 어두운 역사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평소에 정치 중립을 표방하던 존 버커우 하원의장은 "나는 정부에서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지만 만약 의회 정회가 사실이라면 이는 헌법적으로 포악한 행위"라고 지적했다. 지난 7월 존슨 정부 출범과 함께 물러난 필립 해먼드 전 재무장관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의회가 정부를 뒷받침하지 못하면 이는 헌법 유린이다"고 밝혔다. 이날 정회 소식이 알려지자 런던 총리 관저 앞에는 수백명의 시위대가 몰려나와 "쿠데타를 멈춰라"고 외치며 EU 깃발을 흔들었다. 주요 대도시에서도 수천명의 시위대가 운집했으며 영국 의회 사이트에 올라온 정회 반대 청원에는 100만명이 넘는 참여자가 모였다. 노동당 측은 3일 하원이 다시 열리면 즉시 불신임 투표 논의를 시작할 예정이나 보수당 내 반란표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를 강행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일간지 가디언은 관계자를 인용해 야당들이 노딜 브렉시트 발생시 EU 탈퇴를 의무적으로 연기하는 법안에 집중하기로 합의했다고 전했다. 민간 펀드회사 대표로 반(反) 브렉시트 활동을 벌여왔던 지나 밀러는 고등법원에 이번 조치의 적법성을 검토해 달라는 신청서를 내기도 했다. 이 와중에 노딜 브렉시트를 지지해 왔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28일 자신의 트위터에다 "존슨 총리에 대한 불신임 투표를 노리고 있는 코빈 대표는 뜻을 이루기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적었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은 "존슨 총리는 정확히 영국이 찾던 지도자이며 훗날 '위대한 인물'로 증명될 사람이기 때문이다"고 주장했다. pjw@fnnews.com 박종원 기자
2019-08-29 16:42:38경북과 경남의 중년여성농업인 최고경영자(CEO)들이 한 자리에 모여 창립총회를 갖고 농업과 농촌의 발전을 도모했다. 만 40세에서 65세 사이의 영남권 중년여성농업인 CEO 40명이 지난 7일 농협중앙회 대구지역본부 5층 회의실에서 중년여성농업인 CEO 영남지부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임원을 선출하고 사업방향을 설정했다. 이날 호수목장을 운영하는 안일윤 대표가 회장에, 한선희 샘이깊은물농장 대표와 박정숙 하늘샘푸드 대표가 부회장에, 임현숙 추밀원농장 대표와 정경숙 함안블루베리농장 대표가 감사에, 이보영 영주생탁 대표가 사무국장에 각각 선출됐다. 이들은 △공정생산을 통한 건강한 먹거리 생산, 유통, 판매 △공정소비를 위한 생산지에서의 농산물 소비자 교육 △공정여행자를 위해 숨은 역사와 문화를 발굴, 이야기가 있는 농촌만들기 △체험활동을 통한 도농교류사업 △농촌복지증진과 여성농업인의 지위향상을 위한 활동을 사업방향으로 설정하고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안 회장은 "중년여성농업인 CEO들이 모여 그 동안의 노하우를 공유, 농업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고령화된 농촌에 초보농사꾼들을 잘 육성, 농촌에서 희망의 노래소리가 울려퍼지게 하겠다"고 말했다. gimju@fnnews.com 김장욱 기자
2017-03-08 16:24:32태평양전쟁을 일으킨 A급 전범인 히로히토 전 일왕의 막내동생이자 아키히토 현 일왕의 삼촌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이 27일 아침 입원해 있던 도쿄 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100세. 미카사노미야 친왕은 전쟁의 참혹함과 피해자에 대한 반성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전한 평화주의자로 평가된다. 27일 아사히신문은 미카사노미야 친왕이 지난 5월부터 급성 폐렴으로 입원해 심장 기능이 저하된 상태로 재활 중이었으나, 이날 8시경 심장마비로 별세했다고 보도했다. 미카사노미야 친왕은 전임 요시히토 일왕의 넷째 아들로 1915년 태어났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해 중국 난징 총사령부에서 참모직을 지냈다. 그는 당시 일본군의 군기 문란과 잔학행위에 대해 군 내부에 반성을 촉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카사노미야 친왕은 전후 자신의 저서에도 "지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은 전쟁의 죄악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전후에는 역사학자의 길을 걸었으며, 고대 오리엔트사 등을 연구했다. 1955년부터는 도쿄여자대학, 아오야마가쿠인대학, 도쿄예술대학 등에서 강단에 올랐다. 그는 지속적으로 전쟁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견지했다. 한국·중국 등 피해자에 대한 소신 발언을 해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일본의 전쟁을 억제하는 평화 헌법 개정 당시 미카사노미야 친왕은 "진정으로 평화를 사랑하고 절대 침략을 하지 않는다는 진심을 보여 세계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며 전쟁 포기를 지지하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당시 그는 일왕 자문기구인 추밀원 의원으로 재직했다. 또 1998년 장쩌민 당시 중국 주석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에는 "일본군의 폭행을 눈으로 보았으며, 지금도 매우 부끄럽고 마음에 걸린다"며 "중국인들에게 사죄하고 싶다"는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1년 화족의 딸 유리코와 결혼했으며, 2015년 12월에 100세를 맞았다. 슬하에 3남 2녀가 있으나, 아들 세명은 모두 사망했다. NHK는 왕위 계승 서열 5위였던 미카사노미야 친왕이 별세하며 일왕 직위를 계승 가능한 남성이 4명밖에 남지 않았다고 전했다. bhoon@fnnews.com 이병훈 기자
2016-10-27 14:59:09태국의 왕위계승 절차가 최소 1년 가까이 연기되면서 지난 2014년 쿠데타로 집권한 쁘라윳 찬 오차 태국 총리의 입지가 더욱 굳어진다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70년만에 왕이 바뀌는 상황에서 이를 주도적으로 완수해 왕실을 옹호하는 보수세력의 지지를 얻는다면 장기집권도 가능하다는 분석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7일(현지시간) 태국 왕실의 권력 공백이 쁘라윳 총리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쁘라윳 총리는 푸미폰 아둔야뎃 태국 국왕이 서거한 13일 발표에서 앞으로 1년간을 애도기간으로 정했다. 그는 2일뒤 왕위 계승자 마하 와치랄롱꼰 왕세자가 애도기간이 끝난 이후 즉위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같은 날 태국 과도의회인 국가입법회의의 피라삭 포르짓 부의장은 헌법에 따라 국왕 자문기구인 추밀원의 쁘렘 띤나술라논 원장이 그동안 섭정을 맡는다고 발표했다. 태국 치앙마이대학의 폴 챔버스 동남아시아연구소 조사국장은 계승 연기가 쁘라윳 총리에게 기회가 된다고 봤다. 그는 "쁘라윳 총리는 왕실 지지 세력이라는 정치적 자본을 얻을 수 있으며 훗날 그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챔버스 국장은 "쁘라윤 총리는 새로 들어서는 왕권과 그 제도를 보호하는 군사독재자로 부상해 장기 집권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쁘라윳 총리는 2014년 5월 쿠데타로 잉락 친나왓 전 태국 총리가 이끄는 민주정부를 전복한 뒤 민정이양을 추진한다고 약속했지만 아직까지 지키지 않고 있다. WSJ는 쁘라윳 총리가 비록 쿠데타 집권이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소박한 언변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고 평가했다. 태국 유권자의 61.5%는 지난 8월 국민투표에서 군부가 제안한 개헌안에 찬성했다. 17일 태국 언론에 따르면 산센 깨우깜넷 태국 정부 대변인은 "쁘라윳 총리과 정부 행정과 관련된 일정을 (애도기간과 상관없이) 차질 없이 진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말했다. 태국 군부는 지난 8월 발표에서 2017년 11월에 총선을 통해 민정이양을 실시하겠다고 선언했다. 쁘라윳 총리는 8월만 해도 "민주적이고 품위 있는 방법을 통해" 정치에 참여하겠다고 주장했으나 9월에는 "내가 차기 총리가 될지 여부는 미래의 문제이기 때문에 논의할 필요가 없다"고 말을 흐렸다. pjw@fnnews.com 박종원 기자
2016-10-18 16:56:13이토 히로부미(1841~1909년)는 일본의 위인이다. 우리 한국인들이 아무리 곱게 보려 해도 곱게 볼 수 없는 그이지만, 일본 역사에서는 영원한 거목이다. 개화기 일본을 부국강병의 길로 이끌고 총리 네번에 추밀원, 귀족원의장까지 지낸 그를 위인에 넣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일일 것이다. 천엔짜리 지폐에 그의 초상이 오랫동안 들어가 있었던 것(1963~1984년)도 그에 대한 예우를 보여주는 증거다. 일본인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그의 마지막 인상은 총탄에 쓰러진 애국자다. 그것도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테러리스트'라고 막말을 날린 한 한국인의 총에 맞아 숨진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한국인들에게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적이다. 간교한 술수와 무력으로 대한제국을 집어 삼키는 데 앞장선 침략의 원흉이다. 동양평화를 앞세우면서 뒤로는 총칼로 이웃나라들을 짓밟은 평화의 파괴자다. 안중근 의사(1879~1910년)가 지적한 이토의 죄는 무려 15가지다. 안 의사는 법정 진술에서 △대한제국의 국모(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고종황제를 강제로 폐위시킨 죄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 동양평화를 철저히 파괴한 죄 등을 이토 단죄 이유로 들었다. 개인 자격이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군인 신분으로 처형했다고 당당히 말했다. 재판 관할권도 없는 일본이 1910년 2월 10일부터 불과 일주일간 여섯 차례에 걸쳐 속사포식으로 진행한 공판에서다. 이토와 안 의사를 보는 시각은 이렇게 극단적이다. 한쪽의 '위인'이 다른 한쪽에서는 용서못할 '원흉'으로, '영웅'이 '테러리스트'로 확 뒤집어진다. 식민지배의 가해국과 피해국의 입장 차에서 오는 숙명적 결과다. 하얼빈 역에서 이토가 안 의사의 총탄에 쓰러진 건 1909년 10월 26일 아침. 104년여의 세월이 지난 오늘, 그때의 이야기를 새삼 끄집어 낸 건 다른 뜻에서가 아니다. 당시와 단순 비교할 순 없어도 적지 않은 곳에서 삐거덕거리고, 서로를 적대시하게 된 두 나라의 관계가 안타까워서다. 이 같은 험악한 상황을 벗어나려면 일본의 정치인, 각료들이 역사 공부를 바로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 또한 솔직한 이유다. 비뚤어진 과거사 인식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한국인들의 요구가 성가실지 몰라도 그들의 '반성'과 '겸허'는 보통의 일본인들 것보다 더 깊고 더 진지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더 그렇다. 위인전 속의 이토 전기를 읽으며 자랐다 해도 정부 대변인이 이웃나라의 애국지사를 테러리스트라고 모욕 주는 악의적 발언이 반복되는 한 일본은 한국인들에게 '영원히 먼 나라'다. 침략을 진출이라는 용어로 포장한 역사교과서로 일본이 자국 학생들의 눈을 가린다 해도 한국의 교실에서는 대한제국의 슬픈 역사가 시퍼렇게 살아 있다. 조선을 짓밟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기억이 흐릿할진 몰라도 근세기 대한제국의 치욕과 일제 강점기 고통을 잊은 한국인은 거의 없다. 말을 하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도 일본의 지도자들은 오늘도 반성과 참회를 뒤로 물린 채 적반하장의 거짓으로 도발을 일삼고 있다. 일본 문부과학성이 역사교과서 검정결과의 뚜껑을 곧 연다. 이미 공개됐어야 할 결과가 늦춰졌다는 게 외교가의 중론이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25일(현지시간)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을 의식한 포석이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포석이 잔꾀인지 아닌지는 결과만 나오면 가려진다. 정상회담에서 아베 총리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반갑다'며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역사교과서가 진실을 거듭 외면하고, 정치인들이 후안무치의 막말 경쟁을 멈추지 않는 한 결말은 뻔하다. 한국을 가장 소중한 이웃이라고 치켜세우는 아베 총리의 발언은 또 한차례의 속임수가 되고 말 것이 분명하다. 정상회담을 수십번 한다 해도 벌어진 두 나라 사이는 좁혀질 턱이 없다. 개탄스러운 일이다. 26일은 뤼순감옥에서 안 의사가 일본에 의해 죽음을 맞은 순국일이다. 안 의사의 곧은 인품과 동양 평화를 갈구한 진심은 수십점의 유묵에 생생히 살아 있다. 일본 정치인들이 안 의사의 옥중 일화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래도 테러리스트라는 막말을 입에 올릴지 궁금하다. tanuki2656@fnnews.com
2014-03-26 17:21:26안중근어머니 편지 안중근 의사의 사형선고일인 2월14일 부터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가 남긴 편지가 누리꾼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안중근 의사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는 그가 사형선고를 받자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맘 먹지 말고 죽으라"는 내용의 편지를 남겼다. 또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고 편지를 끝맺었다. 한편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일본 초대 총리를 지냈던 이토 히로부미 추밀원 의장을 저격한 후 현장에서 체포됐다. 안중근 의사는 이듬해인 1910년 2월14일 사형을 선고받아 3월26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조 마리아 여사는 아들이 결국 처형된 뒤 중국 상하이에서 당시 임시정부 인사들에게 여러가지로 도움을 주어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불린 것으로 전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8월 조마리아 여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onnews@fnnews.com 온라인뉴스팀
2014-02-15 09:18: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