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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장칼럼] 이건희 회장의 9년 전 고언(苦言)

[차장칼럼] 이건희 회장의 9년 전 고언(苦言)

"삼성뿐 아니라 한국 전체가 정신을 안 차리면 앞으로 5~6년 뒤 아주 큰 혼란이 올 겁니다."

2007년 3월 서울 모처 행사장에서 나오던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취재진에 화두로 던진 한국경제 위기론은 당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샌드위치 위기론을 제기한 지 두달 만의 일이었다. 수년 연속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포스코 등 한국경제 스타플레이어들의 수익성이 줄줄이 하락하는 등 산업 전반이 일본과 중국사이에 끼여 경쟁력이 저하되자 이 회장은 우리 경제에 경각심을 일깨우는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룹 총수의 이례적이고 직설적인 일침은 민간기관들의 우울한 경제전망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정부는 지나친 비관론을 경계해야 한다며 평가절하했다. 경제성장률 4~5%대의 지속성장 등이 반박논리의 밑천이었다. 심지어 재정경제부는 정례 브리핑에서 금융시장위기 등에 따른 경제위기 역시 없을 것이라고 공언까지 했다.

그러나 1년 후 글로벌 금융위기로 기업들이 휘청거렸고, 2009년 이후 건설업계엔 부도 한파가 몰아쳤다. 글로벌 경기침체에 따른 물동량 감소와 중국의 저가수주로 고전하던 조선업계는 2013년 자율협약에 들어간 STX조선을 기점으로 여진이 확산돼 지금은 빅3마저 수술대에 올랐다. 철강은 보호무역주의 기조와 중국산 저가제품에 밀려 사면초가다. 2000년대 중반 역대급 호황을 누리던 해운업종은 그동안 쌓아온 기반마저 통째로 흔들리는 등 한국경제를 지탱하던 전통적인 주력산업들이 중국발 공급과잉과 신보호주의, 경쟁 격화 등 3각 파고에 치명타를 입었다. 더구나 한국 간판기업인 삼성전자, 현대자동차조차 안팎의 악재로 수출 성장세가 꺾였다. 역성장한 스마트폰과 자동차는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각각 6%, 8%에 이르는 대형 수출품목이다. 연관산업까지 감안하면 경제 전반에 미치는 여파가 작지 않다. 우리나라의 성장기반이던 건설, 조선, 철강, 해운에 이어 수출전선의 버팀목인 스마트폰, 자동차까지 더 이상 밝은 미래를 장담할 수 없게 됐다.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에 산업의 성장판이 닫히고 있으니 이것이 위기가 아니면 무엇일까. 작금의 상황은 거시적인 안목 부재, 단기 위주의 성과와 처방 등 복합적 요인이 초래한 결과이지만 무엇보다 위기를 위기로 바라보지 않는 안일함이 중심에 있다.

위기는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다는 '하인리히 법칙'이 있다. 시간을 거슬러올라가면 현 위기 전조의 시작점은 표면적으로는 업종 대표기업들의 현저한 영업이익률 감소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쓴소리에 거부 반응부터 일으키는 우리의 속성에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9년 전 어렵게 꺼낸 재계 원로의 고언(苦言)이 정부의 반박과 함께 묻힌 게 대표적이다. 그때 모두가 자성하고 선제적 대응방안을 도출해 실행에 옮겼다면 현재의 모습은 달라졌을 수도 있다.

"한국경제는 지금 위기상황입니까?" 이 회장에게 이같이 묻는다면 그는 9년 전에 했던 말을 되풀이할 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정신 바짝 차리라고.

winwin@fnnews.com 오승범 산업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