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

[fn사설] 적폐라 해놓고 대기업에 또 손벌리나

정부 ‘요청’은 기업에 ‘압력’ 이참에 준조세부터 손보길

정부가 대기업에 수천억원의 기부금을 요청해 논란이 커지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최근 1단계 산업혁신운동에 참여한 기업들에 2단계 사업 기부금으로 2700억원을 내달라고 요청했다. 경영환경이 열악한 2.3차 협력사를 위해 스마트공장을 짓고 생산.경영 노하우를 전수하는 데 드는 비용을 대기업이 대라는 것이다. 대한상의는 정부 요청에 따라 이를 집행할 추진본부를 만들었다.

혁신운동 취지야 나무랄 데 없지만 문제는 막대한 재원이다. 2013년부터 시작한 1단계 사업에서는 대기업과 중견기업 등 97개사가 2277억원을 냈다. 이 가운데 92%가 대기업 몫이다. 오는 8월부터는 서비스업까지 범위를 넓혀 2단계 사업을 추진한다. 금액이 2700억원으로 늘어난 이유다.

논란이 일자 산업부는 "자발적인 기부금 요청일 뿐 기업을 압박한 적은 없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곧이 곧대로 들리지 않는다. 한달 전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사건 1심 재판부는 미르.K스포츠 재단을 통해 대기업으로부터 774억원을 걷은 부분을 유죄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기업의 존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대통령의 요구를 거절할 기업은 흔치 않다"고 했다.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냈다는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돈을 걷는 창구가 전경련에서 대한상의로 바뀌었을 뿐이다.

재계는 난감하다. 과거처럼 정부가 좋은 일을 한다고 기부금을 선뜻 내기가 부담스럽다. 이사회 의결 등 절차도 까다롭게 고쳤다. 가뜩이나 법인세.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등으로 기업 경영여건은 최악이다. 최근엔 경영권을 흔들 상법 개정도 추진 중이다.

비자발적 기부를 포함한 준조세는 박근혜정부 들어 급증했다. 대기업 기부를 적폐로 몬 문재인정부도 이 전철을 밟는다. 농림축산식품부는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을 모으려 대기업과 간담회를 추진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정부가 복합쇼핑몰 하나 짓는 데 수백억원의 상생펀드를 만들라 한다. 평창올림픽 때는 이낙연 국무총리가 전경련을 통해 티켓을 사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후보 시절 "준조세 금지법을 만들어 기업을 권력의 횡포에서 벗어나게 하겠다"고 말했다. 국가가 기업에 조세 납부 이외에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는 어디에도 없다. 중소기업 지원이 필요하다면 정부가 예산을 풀어 당당히 추진하면 될 일이다. 기업의 팔을 비틀어 자금을 조성하고 그걸 정책자금처럼 쓰겠다면, 그게 바로 준조세다.
재벌개혁을 외치면서, 툭 하면 기업에 손 벌리는 것도 적폐다. 현재 국회에는 10여개의 준조세 금지법안이 계류 중이다. 정부·여당은 대통령 공약대로 이 법부터 통과시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