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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스트리트] 볼리바르화 수난 시대

베네수엘라 볼리바르화의 가치가 날개 없이 추락 중이다. 초(超)인플레이션 탓이다. 16일(현지시간) 수도 카라카스의 한 상점에서 2.4㎏짜리 생닭 한 마리가 1460만볼리바르(약 2500원)에 거래될 정도다. 털이 뽑힌 생닭 진열대 뒤에 산더미처럼 쌓인 지폐를 클로즈업한 외신 사진을 보라. 베네수엘라 경제의 처절한 실상이 응축돼 있다.

이처럼 가공할 물가상승은 1차 세계대전 패전 후인 1923년 독일의 상황을 방불케 한다. 당시 독일인들은 빵 한 덩어리를 사려면 수레에 돈뭉치를 실어 날라야 했다. 지금 베네수엘라 시민들도 20㎏들이 브라질산 쌀 한 포를 사려고 해도 돈을 담을 더 큰 부대가 필요하단다. 그래서 볼리바르화는 희화화의 대상이 됐다. 지폐를 접어 만든 벨트.핸드백 등 공예품이 화폐 액면가보다 훨씬 더 비싸게 팔리는 역설과 함께….

20일부터 10만대 1로 액면 절하한, 새 통화 '볼리바르 소베라노'를 도입한다지만 초인플레는 쉬이 진정될 기미도 없다. 올 연말엔 인플레이션율이 100만%에 이를 것이란 국제통화기금(IMF)의 예측까지 나왔다.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의 베네수엘라 좌파 정부는 외화 부족으로 외국에 의뢰해 돈을 찍기도 어려운 처지라 올 2월 가상화폐 '페트로'를 도입했다. 하지만 슈퍼마켓 진열대들이 텅텅 비어 있으니 이마저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었을 듯싶다.

베네수엘라는 한때 잘나가는 '석유 부국'이었다.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은 국내적으로 교육.의료 등 각종 '무상 시리즈' 정책과 함께 이웃나라에 싼값으로 석유를 제공하는 선심 외교를 펼쳤다. 남미에서 '좌파 벨트'를 구축하려는 그의 야심은 현 시점에서 보면 과대망상이지만 당시엔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오죽하면 우리 좌파 진영에서조차 그를 미국 주도 신자유주의에 맞설 롤모델로 여겼겠나.

그러나 이후 베네수엘라는 유가하락을 부른 미국발 셰일혁명에 직격탄을 맞았다.
고유가 시절 미래 먹거리를 만들지 않고 달러를 펑펑 쓴 대가는 참담했다. 이미 베네수엘라 전체 인구의 10%가 살길을 찾아 앙숙인 콜롬비아 등 외국으로 빠져나갔다니 말이다. 국가가 포퓰리즘을 파는 동안 시장은 응징을 준비한다는 속설이 실감난다.

kby777@fnnews.com 구본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