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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경캡의 경찰이야기](6)일제경찰 청산 노력, 미완의 아쉬움

[시경캡의 경찰이야기](6)일제경찰 청산 노력, 미완의 아쉬움
최능진(1899~1951년)은 일제강점기친일 청산을 위해 일생을 바친 한국의 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민족주의자이자 대한민국의 경찰입니다.

광복 후 미군정은 극도로 혼란했던 남한의 치안 확보를 이유로 일제경찰 출신 한국인 상당수를 경찰로 채용했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미군정기 전체 2만5000명의 경찰관 중 일제경찰 출신이 5000여명으로 전체 20% 였다고 합니다.

대다수 80% 경찰은 일제경찰과 무관하다고 했지만 당시 한국민의 감정을 고려하면 20%는 결코 적지 않은 비중입니다. 독립투사를 고문하던 노덕술, 하판락 같은 악질 일제경찰 출신들의 이미지가 더해져 경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더욱 깊게 했습니다.

때문에 당시 경찰 내부에서도 일제경찰의 경력을 반성하고 친일경찰을 청산하려는 노력도 있었다고 합니다.

1946년 10월 1일 미군정의 식량수급정책에 반발하는 '대구 사건'이 발발하자 미군정은 원인분석과 대책마련을 위해 조미공동위원회를 개최하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일제경찰 청산 등 경찰쇄신 문제도 심도 있게 논의됐습니다.

경무부장 조병옥, 수도경찰청장 장택상과 함께 경찰측 증인으로 출석한 최능진 경무부 수사국장은 "일제경찰 출신, 특히 항일 애국자를 탄압·박해하던 악질 고등경찰 출신을 경무부 당국이 수사경찰의 일선에 배치한 결과 일반 민중의 반감을 사고 있으므로 이를 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주장은 위원회의 경찰쇄신 권고사항으로 채택됐으나 미군정은 이를 수용하지 않습니다. 이후 경찰수뇌부의 눈 밖에 난 최능진 수사국장은 1946년 12월 4일 파면됐고 공개성명을 통해 다시 한번 "소수의 일제주구가 일조일석에 애국자가 돼 건국도상의 민중지도자가 될 수는 없다"면서 "청장, 서장, 간부급에서 이를 제거하라"고 요구해 경찰 내외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최능진의 요구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한편 1948년 8월 정부가 수립되자 수도경찰청 고위간부 20명은 "일제경찰 경력을 반성하며 민족정기를 양양하기 위해 총 사퇴하겠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 이런 노력은 좌우익이 대립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1949년 6월 6일 친일경찰에 의해 반민특위 습격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친일경찰 청산은 미완으로 남게 됩니다.

kim091@fnnews.com 김영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