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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온고지신] SK, 10년 뒤를 생각한다


화려하지는 않으면서도 알차게 실리를 다져온 기업. 경제인들은 SK그룹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여기엔 철저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10년 뒤 무엇을 먹고 살것인가’에 대한 끊임 없는 고민의 길을 걸어온 고(故) 최종현 회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회장은 자신의 배움을 기업 경영에 직접 응용한 보기 드문 총수다. 서울대와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7년간 전공했던 화학은 ‘석유에서 섬유까지’라는 기치 아래 관련분야의 수직 계열화를 이루는 기초가 됐다. 철저한 실용 노선은 세계 경제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시카고대에서 익힌 경제이론에 근거한다.

그 결과는 현재 SK그룹이 자랑하는 섬유·에너지, 화학·정보통신을 꿰뚫는 일관된 흐름으로 구체화됐다.

◇‘제2의 창업’ 선언=최종현 회장은 44세 때인 지난 73년 창업주이자 맏형인 최종건 회장이 갑자기 타계하면서 경영권을 이어 받았다. 이 때 한국경제는 석유파동이 몰고 온 불황의 늪에 빠져 있었다.

불황타개를 위한 대책을 강구해 오던 최회장은 1975년 신년사 형식을 빌려 특단의 발표를 한다. 선경에 본질적인 변혁을 일으킬 원대한 구상이 날개를 달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선경을 국제적 차원의 기업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했다. 그것은 새로운 창업 선언이나 다름 없었다. 그래서 최회장의 1975년 신년사는 1953년 실제 창업 이후 오늘날의 SK그룹을 있게 만든 ‘제2창업선언’으로 불리고 있다.

최회장의 신년사 메시지는 분명했다. 그의 목표는 두 가지였다. 그 하나는 석유로부터 섬유에 이르는 산업의 완전계열화를 확립하고, 나머지 하나는 국제적 기업으로서 손색 없는 경영능력을 배양시키데 주안점을 두었다.

‘석유에서 섬유까지의 완전 계열화’가 그룹의 하드웨어의 완성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경영능력의 배양’은 기업을 운영하는 ‘소프트웨어’ 정립을 목표로 삼았다.

신년사에서 밝힌 그의 구상은 하드웨어적인 면에서는 1991년 울산컴플렉스의 완성으로, 소프트웨어적인 면에서는 1979년 SKMS 정립 및 1989년 SUPEX추구법 도입으로 달성되었다. 이는 SK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우량기업으로 도약하는 데 결정적인 초석이 된다. 이를 바탕으로 SK는 수직계열화의 첫 작품인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한다.

◇준비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선경의 장기경영목표였던 ‘석유에서 섬유까지’가 가시화되던 1980년 초반, 최회장은 새로운 경영목표를 구상했다. 정보통신사업이 바로 그것이다.

최회장은 1992년 신년사에서 정보통신으로 진출하는 배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석유에서 섬유까지’의 수직계열화 완성이 가시화될 즈음인 10여년 전부터 앞으로 어떤 사업을 해야할 것인가에 대해 심사숙고해 왔습니다. 새로운 사업이라고 해서 아무 업종에나 진출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기존업체와의 불필요한 경쟁을 피하고 국가산업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는 분야를 우선적으로 생각했고 또한 급속히 진전되고 있는 글로벌리제이션 시대에서의 성장가능성도 고려했습니다.”

이러한 구상에 따라 최회장은 1984년 미주경영기획실에 텔레커뮤니케이션팀부터 신설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정보통신 분야에 대한 법적, 제도적 여건이 구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선경은 정보통신사업의 선진국인 미국이 보유한 정보와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텔레커뮤니케이션팀을 이용했다.

이어 1990년 10월 선경은 한국IBM과의 제휴, ㈜YC&C(Yukong Computer & Communication Limited)를 세운다. 설립 초기 YC&C는 주로 워크스테이션 사업과 소프트웨어 개발 판매에 주력했지만 점차 PC사업 및 MIS 용역 등 관련분야로의 사업확대를 통해 시스템통합(SI) 사업 진출을 시도했다.

대한텔레콤의 전신인 선경텔레콤은 1991년 4월 설립되어 역시 선경의 정보통신사업 진출기반의 한 축을 구축했다. 선경텔레콤은 정보통신기업들을 대상으로 조사용역, 교육훈련, 경영진단, 컨설팅 사업 등을 벌였고 1992년 6월10일 대한텔레콤㈜으로 상호를 변경, 제2이통통신 사업권 획득에 참여하게 된다.

◇10년의 숙원, 정보통신산업 진출=1990년 7월12일 체신부는 이동통신 분야의 경쟁체제 도입을 주요 골자로 하는 ‘통신사업 구조조정계획’을 발표했다.

이동통신사업을 둘러싸고 한바탕 재계의 지각변동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선경은 자신감에 충만해 있었다. 선경은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정보통신사업 진출을 위한 준비를 착실하게 쌓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92년 6월26일 선경은 총 20만 페이지에 달하는 제2이동통신 사업계획서를 체신부에 제출했다. 1차 심사발표에 이어 2차 심사발표에서도 선경이 압도적인 차이로 최고점수를 획득, 제2이동전화사업 최종 허가대상 법인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체신부의 발표가 나자 각 언론사에는 국민들의 항의가 쏟아졌다. ‘현직 대통령의 인척기업에 엄청난 이권이 걸린 사업을 허가한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이었다. 최회장은 기자회견을 열어 선경의 사업권 획득이 정당한 노력의 결실임을 강조했지만 일단 한쪽으로 쏠려버린 여론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92년 8월27일 당시 대한텔레콤 손길승 사장은 제2이동통신 사업권 반납을 천명하고 “오해를 받을 우려가 없는 다른 정권하에서 실력을 객관적으로 인정받아 이동통신사업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최회장은 92년 사업권 반납 결정에 이어 다시 한번 대승적 차원의 결단을 내렸다. 그는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포기하고 3500억원 내외의 막대한 인수자금이 예상되는,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으로서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두고 다른 기업과 경쟁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선경은 한국이동통신 주식의 경쟁입찰에 참여해 한국통신이 보유한 한국이동통신 주식의 23%인 127만5000주를 시가를 훨씬 웃도는 가격인 주당 33만5000원에 인수했다. 인수에 필요한 대금은 총 4271억2000만원이었다.

일부에서는 한국이동통신의 내정가격을 낮추기 위해 선경그룹이 한 두 차례 유찰시킬 것으로 예상했으나 최회장이 직접 나서서 유찰을 막고 입찰가격도 예상보다 1500억원 이상 더 올려 정하도록 했다. 10년 동안 준비해온 사업이었기 때문에 가격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국이동통신은 이후 ‘SK텔레콤’으로 사명을 변경하고 정보통신사업의 선두주자로 성장하게 된다. 그 결과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 바탕에는 세계 최초의 코드분할다중접속방식(CDMA) 상용화라는 신화가 자리잡고 있었다.

‘단군 이래 가장 큰소리 칠 만한 기술’이라고 할 정도로 CDMA 상용화는 현재까지 우리나라가 정보통신강국으로 부상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물론 ‘CDMA 신화’가 SK텔레콤의 단독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SK텔레콤이 기술의 발주자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 또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 sejkim@fnnews.com 김승중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