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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企 거인] 고려가구 강대현 회장


규격은 완전했고 재질 또한 뛰어났으며 겉으로도 뚜렷이 잘못된 게 없었다. 그러나 완성된 가구를 들여다보면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대로 팔면 되지만 강대현 회장(53)의 자존심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가구를 제작했다. 꼼꼼히 제작과정을 체크해가며 정성을 기울였다. 그렇게 완성된 가구 역시 여전히 허전해 보였다. 지난 83년부터 10년 넘게 사무용가구를 만들어 왔지만 이번처럼 마음에 들지 않은 적은 없었다.

강회장은 피로감을 느꼈다. 전신에 몰리는 피로감은 그를 절망케 하는데 충분했다. 그는 그 길로 고향인 강원도 홍천으로 향했다. 1994년의 일이다.

“사업장을 옮겼습니다. 수도권의 비좁은 작업장에서는 결코 만족할 만한 작품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지요. 산 좋고 공기 맑은 곳에서 자연의 숨결을 가구 속에 그대로 집어넣어야 한다는 생각만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공장을 서울 근처에 두고 있으면 여러 모로 편리했다. 사람을 구하고, 자재수송을 하는데도 수월했다. 부동산가격의 상승도 기대할 만했다.

그는 이러한 편리나 기대를 모두 버렸다. 그가 추구한 것은 자신이 먼저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가구 속에는 무엇보다 아늑함이 있어야 합니다. 자연의 아늑함이 가구 곳곳에 배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작품을 만들기 위해 그는 공장을 서울 근처에서 강원도 홍천으로 옮긴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먼저 원목의 한 부문인 정재목을 사들였다. 오래도록 휨이나 비틀림, 갈라짐 등 외관의 변형을 없애기 위해서는 정재목이 단연 최고였다. 물론 비싼 게 흠이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정재목을 가지고 가구를 손수 제작했다. 기계를 쓰지 않고 대부분의 과정을 수작업으로 처리했다. 정성이 담겨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원목의 무늬를 최대한 살리는 기법을 개발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원목의 부드러운 나뭇결이 쏟아내는 선에 포인트를 준 이 기법은 이후 고려가구의 특징이 되었다.

홍천에서의 가구제작은 성공이었다. 그가 보아도 훌륭한 작품이 연이어 만들어졌다. 중역용시리즈, 회의용테이블시리즈, 체리콤비시리즈 등이 잇따라 개발됐다. 그는 비로소 가구 작품에 대해 만족함을 만끽했다. 홍천으로 작업장을 옮긴 것도 잘했다는 평가를 스스로 내렸다.

시장에서의 반응도 좋았다. 장인정신으로 무장된 고려가구의 제품은 소비자들의 이목을 끄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다소 가격이 높지만 고려가구는 고가 사무용가구시장을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95년에 연매출 200억원에 이어 96년도에는 300억원을 올렸다.

하지만 가구산업은 경기에 예민한 법이었다. 시련이 다가왔다. 97년말 IMF 외환위기가 닥친 것이다.

“당시 부도어음을 모아 보니 라면박스로 몇개가 되더군요.”

그가 이때 얻어맞은 연쇄부도어음 액수는 무려 50억원. 재정이 탄탄한 중소기업이라지만 타격이 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 위기를 벗어나는데 무려 3∼4년이 걸렸다. 2003년 들어 고려가구는 다시 옛 영화를 찾고 있다.
매출이 급속도록 늘고 있는 것이다.

“시장상황이 어렵더라도 소비자들은 기술력이 탁월한 제품을 버리지는 않습니다.” 고려가구는 마니아들이 있어 판매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 dikim@fnnews.com 김두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