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만의 재회’
프란츠 아이머의 고향은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다.
1945년 소련의 붉은군대에 의해 독일로부터 해방될 당시 프란츠는10세였다. 구두를 짓는 일을 가업으로 하는 부모와 15세 되는 형 리게, 13세 된 누나 엘리자베스 그리고 7세된 남동생 마티아와 부다가 가족이다. 페스트가 합쳐지기 전 부다시의 옛시청 가까운 작은 상점가에 부친이 경영하는 작은 구두방이 딸린 오래된 구식 건물에 살고 있었다. 옛시청 모퉁이에 있는 지혜의 여신 아테네는 이 도시의 수호성인이다. 이 여신 방패엔 헝가리 문장이 새겨져 있으며 왼손에 창을 들고 있었다. 어린 프란츠는 이 여신상이 참 좋았으며 자랑스럽게 여겼다.
무뚝뚝하지만 성실한 아버지 그리고 병약했던 프란츠에게 특별히 자상했던 어머니…. 그런 프란츠를 시기하여 몰래 쥐어박기 일수였던 형 리게는 프란츠에게 있어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어머니를 도와 가사를 돕곤하던 누나 엘리자베스가 청소를 하거나 어머니의 빨래를 도울 때 프란츠는 동생 마티아와 우람한 돌산이 올려다보이는 다뉴브 강변의 여러 갈래 산책로를 뛰어다니기도 하고 강을 거슬러오르는 작은 배들을 보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여러 세기 동안 와인을 재배 했었으나 19세기에 포도나무 뿌리 진딧물이 만연한 이후로 더 이상 포도를 재배하지 않고 있는 포도밭도 프란츠와 마티아의 놀아터가 되곤 했다.
세계 제2차대전 중인 44년에서 45년으로 가는 겨울은 독일과 프랑스의 처참한 전쟁터가 되었고 옛부다시의 오래된 건물은 거의 파괴되어 폐허가 되어버렸으며 프란츠의 가족은 작은 구두방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8세가 되면서 성실한 아버지 덕에 프란츠는 가난하나마 대학진학에 할 수 있었고 장래에 변호사가 되겠다는 꿈에 가슴이 부풀어 있었다. 56년 프란츠는 부다페스트 외트베시 로란드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하였다 .
45년 독일의 지배를 받던 조국 헝가리는 이번에는 소련 밑에서 공산주의 시대를 이어갔다. 대학내에는 소련에 대하여 비판적인 분위기가 만연하였으며 프란츠 역시 두말할나위도 없이 소련을 증오했다. 56년 10월23일 헝가리 학생 민중 봉기가 일어났으며 30만 명의 시민 학생이 거리로 뛰어나와 시위를 하였다. 그날 프란츠는 법학입문 강의는 빼먹은채 공대 학생 기숙사로 사용되고 있는 옛재무성 건물 앞에서 있을 반소모임에 참가하기 위하여 평소에 의기투합하던 선배 그리고 동급생 몇명과 행동을 같이 했다. 이 재무성 건물 앞에서 발단된 시위는 10월23일 혁명의 주요 시발점이 되었다. 소련군은 전차 2000대를 헝가리에 투입하여 무자비하게 시위를 진압했다. 이로 인해 노벨상을 받은 사람을 비롯하여 헝가리의 많은 지식인들이 서방으로 망명을 하는 사태가 발생되었다. 프란츠는 우연히 대학의 경제학 교수와 함께 소련군에게 쫓기는 몸이 되었는데 그는 그 교수와 함께 배를 타고 대서양으로 탈출에 성공하게 되었다.
소련군에게 쫓기어 같은 배를 탄 사람은 모두 스물 여덟명. 선장의 도움을 얻어 서방의 여러나라를 향하여 망명을 요청하는 무선신호를 보냈다. 다행히 미국정부로부터 망명자를 받아들이겠다는 답신을 받고 뉴욕항을 향하여 배를 몰았으나 프란츠는 아직 만 18세가 채 되지 않은 미성년으로서 미국 본토에서 그를 보호해 주고 후견인이 되어 줄 양부모를 찾지 않으면 미국 영토에 발을 디딜 수 없는 상황이었다. 프란츠는 배 위에서 미국내의 헝가리 의거 지원 단체가 양부모를 찾아 줄 때까지 기다렸다. 1주일을 기다린 어느날 드디어 양부모를 자청한 미국인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미국에 망명을 하게 되었다. 영어를 할 줄 몰랐던 프란츠는 1년여 양부모 아래서 영어를 익히며 미국생활에 적응하는 법을 터득했다. 고향의 부모 그리고 형제들에게 자신의 소식을 전하려고 여러가지로 방법을 찾았으니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 길이 없었다. 19세가 된 프란츠는 양부모로부터 독립을 하기로 결심을 하고 군대에 지원 입대를 하기로 했다. 입대는 아직 언어가 자유롭지 않은 프란츠에게 있어서 미국 시민으로서 독립된 한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의 하나이기도 했던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난지 10년이 되지 않은 세계는 미국과 소련으로 2분화되고 있었다. 60년대 소련은 스탈린의 시대에서 후르시초프의 시대로 돌입하고 있었으며 미국은 젊은 대통령 케네디의 등장으로 들떠 있었다. 그후 쿠바 문제의 대립으로 두나라의 신경전은 극에 달했으며 우주 개발 전쟁으로까지 번졌다.
59년 입대하여 신병훈련을 마친 프란츠는 당시 최전방인 한국으로 파병되었던 것이다. 한국에 발령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국내에는 군사 쿠테타가 있었는데 61년 5월16일이었다. 그리고 케네디 대통령은 후루시초프와 수뇌회담을 하였는데 이는 한반도의 긴장을 가속시키는 재료료 작용하였으며 약 2년 후 군사분계선(MDL) 근방에서 케네디 암살소식에 소식에 접했을 때 그 긴장은 극에 달했다. 군대는 초비상이 걸려 있었고 프란츠는 비상대기조에 편성되었다.
MDL은 53년 7월27일에 성립한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정전협정)’에 규정된 휴전의 경계선을 말하며, 이것이 이른바 휴전선이다. 그 길이는 모두 155마일(약 250km)로, 서쪽으로 예성강과 한강 어귀의 교동도에서부터 개성 남방의 판문점을 지나 중부의 철원·금화를 거쳐 동해안 고성의 명호리까지 이른다.
당시 휴전시에 군사분계선을 설정함에 있어서 양군의 주장이 대립되었는데, 양군의 현실적인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결정함으로써 휴전협정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양군은 군사분계선 후방으로 남북 양쪽 2km에 비무장지대(DMZ)를 설치하고 있었다. 군사분계선은 200m 간격으로 설치된 황색 표지판으로 구성돼 있는데 표지판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한 것은 한글과 영어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향한 것은 한글과 한자로 각각 표기돼 있다. 총 1292개에 달하며 이중 유엔사가 696개 있는데 프란츠 역시 그중 한 곳에 있었다.
어느날 우연히 소련군측의 감시단중에 헝가리 출신의 병사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프란츠는 헝가리에 남아 있는 가족에게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찬스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소련군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소련군 통치시절의 헝가리에서 배운 러시아어는 프란츠의 그런 생각을 더욱 부추겼다. 판문점 감시병으로 차출되던 어느날 친한 동료와 의기투합하여 한글, 헝가리어, 러시아어로 만든 메모를 북쪽에 슬쩍 건네주었다.
‘나는 헝가리 출신으로 헝가리의 가족에게 소식을 전하고싶음, 소련군 감시단중에 헝가리 출신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으니 누군가 그에게 전해 주기를 바람. 내일 같은 시간에 이곳을 지나칠 것이니 이 글에 대한 회답을 기대 함.’
젊은 북한 병사가 놀란 표정으로 굳어져 있었고 프란츠 또한 커다란 모험이었다. 긴장되어 뻣뻣해진 표정으로 판문점을 시찰하던 프란츠에게 젊은 북한 병사가 스쳐가며 떨어뜨린 메모지에는 헝가리어로 회답이 써 있었다.
‘가족이 사는 곳은 어디입니까? 무엇이라 전하면 됩니까?’
프란츠는 떨리는 가슴으로 다음날을 기다려 다시 같은 병사에게 깨알같이 적은 부모에게 보내는 짧은 편지와 주소를 적은 메모를 보냈다. 그러나 두번 다시 그 병사를 만나는 일은 없었다.
만 4년을 한국에서 근무하던 중 서울 용산 8군 본부로의 이동이 있었고 그곳 매점에서 근무하는 한국여성에게 호의를 가지게 되었다. 가족을 잃고 오랫동안 외톨박이이던 프란츠는 그에게 점점 빠져들어갔으며 처음에는 주저하던 그에게서 데이트약속을 얻어내었다. 아버지가 한국동란 중에 돌아가고 홀어머니 밑에서 3남매가 어렵게 살고 있는 그를 진심으로 도와야겠다고 생각했고 그의 정성에 감동한 그 여자도 마음을 허락 했다. 63년말 본국 귀대명령을 받고 한국인 피앙세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64년 소련은 후르시초프가 해임되고 브레즈네프의 시대가 막을 올렸고 미국은 존슨이 대통령이 되었다.
귀국 후 보스턴 근교에서 근무를 하던 프란츠는 이번에는 독일로 발령을 받는다. 독일과 헝가리 사이에는 오스트리아가 있었다. 휴일이면 독일에서 오스트리아까지 달려가서 헝가리 국경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국경은 서방으로의 탈출을 막기 위함인지 감시가 철저하여 접근할 수조차 없었다. 독일로 발령을 받았을 때는 고향과 같은 대륙에 발을 딛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벅찼다. 어쩌면 헝가리의 가족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를다는 일말의 기대도 있었으나 그 기대는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으며 2년의 독일 근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오는 군용기 속에서 헝가리의 가족에게 연락을 하고 싶다는 꿈을 버렸다.
그후 베트남 전쟁중 베트남 근무를 마치고 다시한번 한국에 발령을 받는 찬스를 얻었다. 이번에는 처음에는 용산본부에 있었으나 후에 부평의 부대로 옮겨졌다. 10여년만에 모국에 오게 된 그의 부인은 매우 기뻐하였는데 이번 한국근무 지원은 부인의 나라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MDL을 통하여 다시한번 소련측과 접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휴전선 근무의 기회는 더이상 프란츠에게는 오지 않았다. 2년 후 미국으로 돌아간 프란츠는 텍사스주에 정착하기로 마음을 먹고 킬린이라는 곳에 집을 장만한다. 킬린은 주정부가 있는 오스틴에서 북으로 30분가량 가면 있는 곳인데, 미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육군 캠프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어느날 프란츠는 헝가리의 누이 엘리자베스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어찌어찌하여 프란츠가 한국 휴전선에서 건네준 메모를 그녀가 받았던 것이었는데 그녀의 말에 의하면 결혼한 그녀는 남편과 부타페스트에 살고 있으나 가족들은 정부의 이주 계획으로 어디론가 보내져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정확한 표현은 없었으나 소련의 지배하의 사회주의 헝가리에서 프란츠의 가족들은 어려운 삶을 영위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77년 카터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세계는 화해 무드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미국과 중국의 국교가 정상화되었으며 세계의 관심은 중동문제에 집중되고 있었고 미국과 쿠바는 상호 양국에 대표부를 설치 할만큼 관계가 회복되고 있었다. 세계의 정세는 급변해 갔는데 프란츠는 다시한번 모국의 가족을 찾을 수 있다는 기대를 갖기 시작했다. 프란츠는 국제적십자사에 탄원서를 제출하게 된다.
국제적십자사를 통하여 가족의 연락을 받은 것은 그로부터 거의 10년 후의 일이었다. 벨기에에 살고 있는 동생 마티아로부터의 편지를 적십자사를 통해 받았다. 가족은 헝가리를 벗어나 벨기에에 살고 있었던 것 이다. 프란츠는 이제까지 헝가리에 살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던 가족이 벨기에에 있었던 것이었다. 즉시 휴가를 내고 벨기에로 향했다.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시고 형은 행방불명이었으니 이미 80세가 넘은 아버지와 동생 마티아와 그의 새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마티아가 살고 있는 곳은 철과 석탄이 풍부하여 광산과 재철소가 많은 왈로니아였고 마티아는 그곳의 제철소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실로 30년만의 재회였다.
▲에필로그
내가 지난해 9월 처음으로 미국땅을 밟은 것은 외할머니가 돌아간 후 20년 가까이 만나지 못한 이모와 이모부을 찾기 위해서였다. 먼 이국땅에서 환갑을 맞는 두 사람을 꼭 한번 만나고 와야겠다는 마음에서였다. 40도를 오르내리는 늦여름의 텍사스를 방문했을 때 이모와 이모부는 빛바랜 옛사진 속의 가족 사진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이모부가 가족 이야기를 하는 것을 나는 처음 들었다. 몹시 흥분된 표정으로 옛이야기를 들려주던 이모부, 나는 이모부가 그저 미국인인 줄만 알았었다. 아기가 없었던 두 사람은 나를 극진히 예뻐하셨고 한국에 발령을 받아 오면 나는 같이 살았다.
외할머니를 극진히 보살폈던 고마운 이모부는 이제 반백의 머리에 주름가 득 웃고 있었다.
얼굴은 백인이지만 작은 체구에 처가식구들을 소중히 여기는 우리 이모부는 오랜 군 생활을 거쳐 이제는 정년퇴임하고 연금생활을 한다. 돌아오는 길에 어스틴 공항까지 바래다 준 고맙기만 한 두 사람의 평화로운 여생을 빌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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