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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영화-力道山]‘슬픈 영웅’ 부활하다



“…흡혈귀 브라쉬/인간산맥 압둘라부처/십육문 킥의 자이안트 바바/빽드롭의 명수 안토니오 이노키/세계적인 레슬러들을 로프반동/튕겨져 나오는 걸 박치기! 당수!/또는 코브라트위스트, 혼쭐을 내주던/김일 천규덕 태그매치조//저녁 여덟시면 나를 어김없이/만화가게에 붙잡아 놓던/그 흥미진진한 프로레슬링…”(유하, 무림일기 57쪽)

‘말죽거리 잔혹사’를 만들었던 영화감독 유하의 시에 등장하는 자이언트 바바, 안토니오 이노키, 김일, 천규덕 등 프로레슬러의 이름은 적어도 중장년층에게는 ‘추억’의 다른 이름이다. ‘당수의 명수’ 천규덕은 김일에게 배웠고 ‘박치기의 왕’ 김일(영화 후반부에 잠깐 얼굴을 비춘다)은 역도산에게 배웠으니 역도산은 한국 프로레슬링의 스승이기도 한 셈이다.

그러나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고 알려진 역도산의 이름 석자는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그의 활약상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사람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한국에도 바야흐로 레슬링 붐이 일어 김일의 박치기로 온나라가 떠들썩해지기 전 역도산은 야쿠자의 칼에 맞아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스크린으로 부활한다. 지난 63년 12월15일 향년 39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역도산이 자신의 41주기 기일(15일)에 맞춰 한국관객을 찾는다.

연기파 배우 설경구가 거구의 프로레슬러로 분한 ‘역도산’(제작 싸이더스·감독 송해성)은 흐릿한 기억 속의 그를, 또는 어설프게 알고 있던 ‘인간 역도산’의 전모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게 한다는 점만으로도 흥미진진하다.

1924년 함경남도 홍원에서 태어난 역도산의 한국이름은 김신락. ‘세계 최강의 요코즈나’(스모 최고선수)를 꿈꾸며 현해탄을 건넌 역도산은 그러나 ‘조센징’이라는 태생적 한계에 부닥쳐 꿈에도 그리던 최고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다. ‘인생은 승부’라는 신념 하나로 온갖 박해와 고통을 견뎌온 역도산은 상투를 자르고 인생의 목표를 바꾼다. ‘일본만의 스모’가 아닌 ‘전세계의 스모’, 즉 프로레슬링의 세계에 입문하는 것이다.

1954년 2월 일본 도쿄 국기원. 프로레슬러가 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넜던 역도산은 유도 선수 출신의 이무라 마사히코와 한조를 이뤄 미국의 샤프형제와 맞대결을 펼친다. 일본 최초의 세계태그선수권대회였던 이 시합에서 역도산은 피의 무승부를 기록하지만 덩치 큰 미국 선수들을 가라데촙으로 때려눕혀 패전의 상실감에 사로잡혀 있던 일본인들을 환호하게 한다.


‘천황 아래 역도산’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큰 인기를 누리게 된 ‘리키도잔’(역도산의 일본식 이름). 그는 영화배우로 데뷔하는 한편, 당대 최고의 패션리더로, 화려한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대저택을 소유한 거부로 윤택한 삶을 꾸려가지만 끝내 자신의 꿈을 이루지는 못한다. 언제나 새로운 스타를 갈구하는 냉혹한 쇼비즈니스(프로레슬링은 하나의 거대한 흥행사업이다)의 세계가 자꾸만 그를 링 밖으로, 또 세상 밖으로 밀어냈던 것이다.

최민식 주연의 ‘파이란’으로 주목받았던 송해성 감독은 “이번 영화는 짐검승부를 하면서 치열하게 살았던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라면서 “그것이 자신에게 슬픔이 되고 독이 되더라도 살아가는 동안만큼은 진검승부를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남자의 숙명 같은 걸 얘기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12세 이상 관람가. 15일 개봉.

/ jsm64@fnnews.com 정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