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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시론]표현의 자유와 역사의 부재/장덕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경제사회학)


박정희 전 대통령을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한 법원의 판결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영화를 보지 못했으니 뭐라 단정적인 평가를 하기는 어렵지만 이를 계기로 우리의 지나간 역사를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시선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얼마 전 한 시민단체는 교과서에 반영된 우리 역사 서술을 두고 ‘자학적 사관’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좀 지나친 표현이라는 감이 없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지적이기도 하다. 90년대 이후에만 해도 우리는 ‘역사 바로 세우기’와 ‘제2의 건국’을 했고 지금도 ‘과거사 규명’을 하고 있으니 우리 역사에 문제가 있기는 단단히 있는 모양이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봐도 역사 청산에 대한 국민 지지는 상당히 높은 편이다.

지나간 역사의 잘못된 부분을 깨끗이 털고 가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는 생각은 원론적으로 나무랄 데가 없다. 그러나 원론이 옳다고 해서 그 부작용조차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대표적인 부작용 중의 하나는 우리 역사에 ‘위인’이 없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인정하고 존경해 마지않는 인물은 누구인가. 일반 국민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인물로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그리고 박정희 전 대통령을 꼽을 수 있다. 이 중에서 박 전 대통령은 경제적 공(功)과 정치적 과(過)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릴 뿐만 아니라 세상을 떠난 지 25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현실 정치에 대한 파급력을 가지고 있으니 국민적 합의에 바탕한 대한민국의 대표 위인이 될 수 있을지는 아직도 더 기다려 보아야 알 일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존경한다고 믿었던 이순신 장군조차도 광화문 동상을 둘러싼 논란에 휩싸이더니 급기야 문화재청장의 ‘부적절한’ 발언까지 이어져 그 명예에 흠집이 생기고야 말았다. 이제 그나마 세종대왕 정도가 근근이 위인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셈인가.

우리 역사에 위인이 없다는 것은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다. 우선 지나간 시대를 살아냈던 어른들 세대에게 그 시대 인물에 대한 폄훼는 세대적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 된다. 비록 지나간 역사가 완벽하지는 못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이름도 명예도 없이 묵묵히 희생하고 땀 흘렸던 사람들은 자신의 시대를 부정하려는 시도에 깊은 상처를 받는다. 현재의 청장년 세대는 무엇보다 ‘공익’을 위해 희생하려는 인센티브를 잃어버리게 된다. 좋은 재능과 노력을 가진 사람이 자신만을 위해 살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큰 뜻을 품고 정치에 헌신하거나 대기업을 일군다면 그는 언젠가 낱낱이 파헤쳐질 것이고 종국적으로는 ‘청산’의 대상이 될 것이라면 우리는 조만간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끔찍한 세상을 보게 될 지도 모른다.

가장 큰 문제는 자라나는 미래의 세대에 미칠 영향이다. 어린 세대에게 위인은 곧 역할 모델이요 자부심의 원천이다. 우리의 청소년들이 우리 역사를 바라보며 ‘자랑스럽다’는 느낌을 갖지 못한다면 그로 인해 장차 한국 사회가 치러야 할 대가는 상상할 수 없이 큰 것이다.

법원의 이번 판결에 대해 여러 문화예술인들과 단체들이 찬반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아직 단정해서 말할 수 없으나 보도된 바에 의하면 역사 사실인 다큐멘터리 장면과 함께 편집된 ‘픽션’ 부분의 수준은 기대 이하인 듯하다. 설사 코미디의 성격을 띤다 하더라도 그 내용이 그 시절 역사에 대한 진지한 다시 보기라면 별다른 문제가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고인의 시신을 앞에 두고 벌어지는 해프닝 등 보도된 몇몇 장면들은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라기보다는 옳든 그르든 치열한 삶을 살았던 한 개인에 대한 인격 침해라는 느낌에 더 가깝다.

10·26 당시 현장에 있었던 가수 심수봉씨는 “불쾌하지만 이 영화가 원본대로 상영되길 바란다”고 말했다고 한다. 필자도 같은 생각이다.
영화는 감독이 연출한 원본대로 상영돼야 한다. 그리고 그 영화를 보고나서 역사적 인물에 대한 지나친 희화화에 불쾌해하는 관객이 많기를 바란다.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되 그것이 균형을 잃었을 때에는 성숙하게 불쾌함을 표현하는 관객이 많아질 때 비로소 표현의 자유와 역사적 자부심은 공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dukjin@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