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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시론]생산적 사외이사를 바라며/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증권선물거래소의 분석에 의하면 지난해 시가총액 상위 10대 기업에서 이뤄진 2536건의 사외이사 참여 의결 건수 중 반대는 5건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보다 1주일쯤 앞서 같은 기관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사외이사의 평균 보수는 연간 4500만원이고 연평균 이사회 개최 건수는 12회다.

그렇다면 간단히 다음과 같은 그림이 그려진다. 사외이사는 한 달에 한 번 회의에 참석해 무조건 찬성해주고 그 대가로 월 400만원 가까운 돈을 받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거기다 사외이사는 대부분 자신의 본래 직업이 따로 있는 사람들로 월 400만원은 이들의 총수입이 아니라 추가 수입이다. 한 달 내내 아침부터 저녁까지 힘들게 일하고도 이보다 적은 보수에 만족해야 하는 보통 사람으로서는 답답한 노릇이고 행여 해당 기업의 주식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내 돈 들여 99% 찬성률의 거수기를 구입한 셈이니 억장이 무너질 일이다.

본래 사외이사 제도는 영미에서 발달한 것이고 그 배후에는 지난 19세기 말부터 진행되기 시작한 기업혁명(주식회사의 폭발적 증가), 20세기 초반에 이미 상당히 진척됐던 소유의 분산, 주식시장에 주로 의존하는 기업금융 방식, 그리고 신용심사에 의한 여신 기능을 담당하는 금융기관의 중심적 역할 등이 자리잡고 있다.

기업이 주식회사가 된다는 것은 남의 돈을 받아서 사업을 한다는 뜻이니 투자자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하고 소유가 분산된다 함은 대주주가 적어지고 다수의 소액주주들이 생겨난다는 뜻이니 누군가가 이들을 대신해 경영을 감시해줘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주식시장에 대한 의존도가 높으면 엉터리 사외이사를 선임할 경우 받게 될 시장의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고 기업의 신용만을 보고 돈을 빌려준 금융기관은 해당 기업에 사외이사를 파견해 경영을 감시할 강력한 인센티브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발달한 영미의 사외이사 제도조차도 그 실효성 여부에 대해 아직도 상반된 증거와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반면 한국의 사외이사 제도 도입 배경은 어떠했는가. 한국에서는 지난 90년대 중반부터 소액주주의 권익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하다가 97년 경제위기와 더불어 사외이사제의 도입이 수면 위로 떠올랐고 즉각적인 법 개정을 통해 98 회계연도부터 상장사의 사외이사 선임이 의무화됐다.

그러나 새로 도입된 제도가 잘 기능하기 위한 환경은 거의 마련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한국에서 영미와 같은 주식회사의 폭발적 증가가 일어난 적은 한번도 없다. 지난 70년대 후반과 80년대 후반에 비슷한 현상이 있기는 했으나 그 증가 폭은 미미한 수준이고 증권거래소 상장 기업 및 종목 수는 90년대 중반 이후 정체 내지는 오히려 줄어드는 추세다.

대주주의 내부 지분율은 미국에 비해 2배 이상 높고 시가총액의 증가 추세에도 불구하고 복잡하게 얽힌 내부지분 관계로 시장의 처벌을 두려워하는 기색도 별로 찾아볼 수 없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부채의 출자전환으로 졸지에 대주주가 돼버린 금융기관은 기업의 경영을 감시하기보다는 그러한 전환을 강요했던 정부를 향해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이러한 상황에서라면 사외이사가 최대주주이자 경영자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을 할 가능성은 매우 낮을 수밖에 없다. 시민사회의 집중적인 비판 대상이 될 정도의 튀는 행동만을 자제하면서 적당히 경영진의 손을 들어주는데 따르는 처벌은 없고 보상은 많기 때문이다.

이제 곧 식목일이다. 나무를 옮겨 심을 때도 토양과 온도·습도·일조량 등을 세심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자칫 죽어버리는 일이 허다하다. 하물며 사외이사와 같은 중요한 제도를 옮겨 심는데 따라야 할 세심한 배려는 두말 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해서 무조건 옮겨 심었다간 추가비용만 초래할 뿐이라는 점을 한국의 사외이사 제도 운용 결과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번 논란이 늘 그래왔듯이 해당 기업이나 사외이사 개인에 대한 비난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그보다는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 경제의 제도와 역사에 잘 맞는 경영감시 기구를 찾으려는 진지한 노력이 훨씬 생산적일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