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장승철기자】하늘도, 땅도 숨가쁘기만하다. 작열하는 태양과 고온 다습한 지열은 도저히 피할 길이 없다. 그나마 한적한 일주도로 옆으로 간간이 고개를 내미는 푸른 파도의 모습만이 잠시나마 더위를 식히는 ‘해방구’일 뿐, 이 끈적함은 섭지꼬지를 쫓는 길목내내 주위를 따라 붙는다.
차에 내려 해변을 끼고 돌아서는데 어디선가 피부에 와닿는 한줄기 미풍. 그 신선함이 몰고온 그윽한 바람에 잠시 정신을 차리니, 눈앞에 갑자기 펼쳐진 낯익은 풍경이 새삼 시선을 붙잡는다.
‘녹색의 벽돌, 겸손히 솟아오른 십자가. 드넓은 평원…. 어디에서 보았더라.’ 인하(이병헌)와 수연(송혜교)이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은은한 대화를 주고 받았던 자리. 지난 2003년 방송돼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시청자의 이목을 한 몸에 받았던 SBS TV 특별기획 ‘올인’의 촬영지가 바로 이 곳, 제주도 서편 성산읍 섭지코지에 새롭게 세워져 있다.
‘올인 하우스’라 이름붙여진 이 곳은 남제주군과 ‘올인’을 제작한 초록뱀미디어가 공동 투자해, 지난 3일 정식 문을 열었다. 2003년 4월 ‘올인’이 종영되면서 성당세트를 중심으로 한 가건물들을 일반에게 개방했지만 그해 9월 불어닥친 태풍 ‘매미’의 여파로 세트장은 전면 철거됐다. 그러나 제주도민과 시청자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세트장 복원을 요구했고 이듬해 3월 남제주군과 초록뱀미디어는 ‘올인’ 세트장 복원에 합의, 총 33억원을 투자해 ‘올인 하우스’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촬영지를 단장했다. 현재 ‘올인 하우스’는 신설법인인 ㈜올인에서 관리한다.
아담한 벽돌구조로 이루어진 ‘올인 하우스’는 지상 1층, 지하 2층으로 총 면적 250평 대지위에 세워졌다. 1층 전시관에는 대본, 의상, 포커 카드 등 드라마 촬영 당시의 소품과 메이킹 필름들이 전시됐고 한켠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애리조나주 그랜드 캐년 등지에서의 촬영 현장 모습들이 작은 화면들 속에서 쉼없이 토해내고 있다.
특히 ‘올인 하우스’에는 드라마 속 상징물을 곳곳에 배치해 안방 극장의 추억을 현실 세계로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인하와 수연 사이를 연결하던 낡은 오르골은 성당 촉탑 아래에 자리를 잡고 은은한 멜로디로 조용한 실내를 살며시 일깨운다. 또 오르골 왼편에는 애틋한 사랑과 질곡쌓인 운명을 상징하던 작은 성당 예식장인 ‘웨딩 채플’이 그대로 재현됐다. 신청하는 국내·외 예비부부들에 한해서는 실제 이곳에서 결혼식도 치를 수 있다.
이밖에 드라마의 플롯이 겜블러의 세계를 묘사했던 만큼 ‘올인 하우스’에는 가족, 친구, 연인을 상대로 한 작은 카지노 테이블도 마련됐다. 칩을 사용하지만 현금으로는 교환할 수 없고 대신 이긴 사람에게는 열쇠고리, 포커 카드 등 기념품을 준다. 딜러들의 현란한 손놀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드라마에서 느껴졌던 엄격한 승부의 세계가 감지된다.
지하로 내려가면 ‘올인’ 영상을 컴퓨터 그래픽(CG)으로 재현한 극장인 ‘올인 시네마’가 있고 오르골을 비롯해 출연자들의 얼굴을 새긴 컵, 열쇠고리, 포커 카드, 칩 등을 판매하는 기념품 가게, 시원한 창문으로 푸른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카페가 자리잡고 있다. 카페를 나오면 빨간 벽돌로 쌓아올린 작은 노천극장이 시원스레 뚫려있다.
계단을 통해 1층으로 올라서면 곧바로 드넓은 바다와 맞닿는다. “나한테 남은 거라곤 가슴에 남은 상처하고 이 집 뿐인데,괜찮겠니?”라고 수연에게 말하던 인하의 마지막 모습이 먼지 쌓인 낡은 기억처럼 옅은색으로 떠오른다.
성모 마리아상이 분주했던 옛 촬영장의 중심에 서 있기 때문일까. 언뜻 건물자체가 성당으로 오인되는지 신자로 추측되는 노인 입장객들은 내내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손을 모은다.
‘올인 하우스’에서 잠시 빠져 나가보자. 섭지꼬지가 안고 있는 빼어난 자연경관 역시 놓칠 수는 없다. 올인 산책로를 따라 10분간 걸으면 오른쪽에 제주도 서편 바다를 밤새 비추는 방두포 등대가 솟아 있다. 고도 40m에 불과한 낮은 등대지만 손쉽게 바다의 진한 내음을 맡기에 최적의 장소다.
왼편으로는 조랑말이 뒹굴고 있고 한켠에는 유채꽃이 아직도 피어 있어 사진찍기에 안성맞춤이다.
사랑과 낭만, 그리고 운명과의 질긴 싸움이 작은 브라운관 안에서 태동해서였을까. 뇌리에 깊이 박힌 이들의 격한 대사가 이 곳 섭지꼬지의 아름다운 풍경과 더불어서는 좀처럼 잊혀지지는 않을 듯하다. 천혜의 절경을 끼고 보기드문 절제 미학을 담아낸 이 곳에서 그들의 대사를 떠올리며 조심스런 추억을 남겨보는 것은 어떨까. 가벼운 바닷 바람과 접하며 상념을 떠올리는 사이, 한동안 쫓던 끈적한 더위도 잠시 잊을 수 있었나 보다.
/
sunysb@fnnews.com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