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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시론]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원종원 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지난 1980∼90대 세계 극장가에서는 ‘빅 4’라는 말이 널리 통용됐다. 다른 작품에 비해 월등한 대중적 인기와 흥행을 기록했다는 의미에서 붙인 네 편의 뮤지컬을 일컫는 말이었다. 방대한 내용이 담긴 빅토르 위고의 원작소설을 원형세트 위에서 끊임없이 이어가는 ‘레 미제라블’, 고양이를 의인화한 T S 엘리엇의 시에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곡을 붙여 만든 ‘캣츠’, 오페라 ‘나비 부인’을 월남전에 맞춰 현대적으로 각색한 ‘미스 사이공’ 그리고 지난 6월초부터 국내 공연을 갖고 있는 ‘오페라의 유령’이 그 주인공들이다.

마니아들의 큰 관심을 모았던 ‘오페라의 유령’이 오는 9월1일 종연을 앞두고 95%에 가까운 객석 점유율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놀라움을 자아내고 있다. 석 달 동안 열의 아홉 자리 반에 가까운 표가 모두 팔려나갔다는 이야기다. 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의 객석수가 2300석 내외인 것을 감안한다면 그야말로 경이로운 기록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 공연을 앞둔 요즘에는 입장권 구하기가 더 더욱 어려워 인터넷을 통해 고액을 호가하는 암거래까지 등장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린다. ‘유령’의 짓이 아니면 불가능해 보이는 인기다.

파리 오페라 하우스를 배경으로 아리따운 오페라 여가수와 수려한 귀족청년 그리고 흉측한 외모를 가진 사내가 펼쳐내는 사랑 이야기가 담긴 이 뮤지컬은 가스통 를루라는 프랑스 추리소설 작가가 1900년대 초 신문에 연재했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사실 이 이야기는 뮤지컬 이전에도 여러 차례 영상화가 시도된 적이 있을 정도로 많은 예술가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뮤지컬 제작에 영감을 주었다는 1925년작 론 채니 주연의 무성영화를 비롯, 대 여섯 차례에 걸쳐 스크린을 통해 때로는 괴기물로 때로는 멜로드라마로 대중에게 선뵌 전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일반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요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작품 이전에도 역시 뮤지컬로 만들어졌던 기록이 있다. 로이드 웨버가 뮤지컬을 선보이기 10여년 전인 1976년 미국 극작가인 켄 힐이 먼저 뮤지컬로 만들어 발표한 바 있기 때문이다. 오펜바흐나 모차르트, 베르디, 베버 등 유명 오페라 작곡자가 만든 음악 멜로디에 영어로 가사를 붙여 만든 이 뮤지컬은 조악한 구성에 완성도는 낮았지만 나름대로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만한 신선함을 갖고 있었고 후에 로이드 웨버와 카메론 매킨토시로 하여금 그들만의 뮤지컬을 만들게 되는 동기를 제공해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켄 힐은 아직도 로이드 웨버와 매킨토시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무단으로 도용했다고 주장한다).

옛 문화상품을 재활용해 다시 태어난 ‘오페라의 유령’은 신화를 창조한 뮤지컬로도 통한다. 지금까지 20여개국 110여개 도시에서 공연됐는데 가장 오래 공연을 계속한 곳은 런던의 허 머제스티스 극장으로 지난 86년 초연 이래 오늘날까지 19년 동안 약 7000여회의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런던 초연 이듬해부터 시작된 브로드웨이에서는 2005년 현재 ‘캣츠’에 이어 두 번째로 가장 오랜 기간 공연돼온 뮤지컬로 기록돼 있는데 종연된 ‘캣츠’와 달리 여전히 인기리에 상연중이어서 내년이면 ‘캣츠’의 최장 공연 기록마저 추월할 예정이다. 지금까지 전세계에서 벌어들인 돈만 해도 약 4조원에 달해 인류 역사상 모든 영화와 연극, 뮤지컬을 통틀어 가장 높은 매출을 기록한 작품으로도 통한다. 물론 이번 내한 공연을 포함해 아직도 이 매출액은 완료형이 아닌 현재 진행형이어서 아직도 그 마지막 수치를 정확히 알 길은 없다. 여기에 음반 수입이나 기념품, 영화 판권 등 부가가치를 창출해낸 관련 산업까지 포함하면 매출 규모는 어마어마한 수준으로 늘어난다.

‘오페라의 유령’은 현대 문화 산업의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한번 만들어 생명을 다하면 사라지고 마는 제조업과 달리 문화산업은 재생산과 재활용의 과정에서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는 시장 속성을 지니고 있다. 관건은 옛것을 가져다 얼마만큼 요즘 기호와 입맛에 맞게 재가공해낼 것인가 하는 지혜와 그에 따른 충실한 완성도의 구현에 달려있다.
베트남 언론의 시기어린 오보가 등장하는 등 요즘 ‘한류’ 열풍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다. ‘한류’는 문화적 우월감의 산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가꾸고 발전시켜야하는 소재이자 기회다. 서구 뮤지컬 극장가의 성공 사례를 우리에게도 접목시켜볼 수 있는 발상의 전환이 절실한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