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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은의 마음의 감기를 치유하는 명화] <7> 고흐 ‘슬픔’



■환상,슬픔을 잊는 묘약

따각따각 컴퓨터 화면에 글자들을 찍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오랜만에 중국 가수 등려군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하네(月亮代表我的心)”라는 감미로운 노래인데, 가슴이 찡해 오는 이유는 이 노래가 나왔던 오래 전 영화 ‘첨밀밀(甛密密)’이 떠오른 까닭이다. 돈 벌기 위해 낯선 홍콩으로 넘어온 주인공 남녀의 눈물겨운 고생, 거듭되는 실패, 뼈저린 외로움이 고향의 가수 등려군의 노래에 사무쳐 있다. 그토록 가난하고 힘겹기에, 그토록 순간적이기에 ‘첨밀밀’ 속의 사랑은 더욱 애절하고 더욱 달콤하다.

‘첨밀밀’은 주인공 남녀의 이야기 사이사이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삽입되어 매력을 더한다. 이를테면 에이즈에 걸린 홍콩 창녀와 연민으로 인해 끝내 그녀를 떠나버릴 수 없었던 미국인, 젊은 날 선망하던 배우와 하루저녁 데이트했던 순간을 한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여관집 여주인도 등장한다. 이 두 이야기를 각각 생각나게 만드는 그림이 있다. 반고흐의 ‘슬픔’과 르느와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의 댄스’이다.

‘슬픔’의 모델을 선 시엔이라는 여인은 재봉 일을 하면서 매춘으로 부수입을 올리면서 살고 있었다. 반 고흐를 만났을 때에는 미혼모인데다가 낫지도 않는 고질적인 성병에 걸려 있었으며, 또 다시 누군가의 아이를 임신한 채 버려진 최악의 상태였다. 그런 그녀를 반 고흐는 내버려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그녀를 그리면서 반 고흐는 그 어느 것으로도 치유할 수 없을, 생의 바닥에 주저앉은 인간의 좌절을 보았다. 화가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인간의 감정을 그려야 한다고 믿고 있던 그는 그녀를 본 순간 비로소 슬픔이라는 감정이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공감하였던 것이다.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의 댄스’는 ‘첨밀밀’ 속 여관집 여주인이 그리던 사랑의 환상 같은 그림이다. 그림에 나오는 여인들을 보자. 그들은 젊고 화사하고 행복해 보인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들의 현실도 ‘슬픔’의 여인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림의 제목이자 무대인 물랭 드 라 갈레트는 파리 몽마르트르에 있었던 대중 댄스홀의 이름이다. 이곳은 입장료가 저렴한데다가 일요일 오후 3시에 열어 자정 넘어 파장했기 때문에 주로 근로여성들, 이를테면 재봉사, 꽃장수, 가발제조자, 상점 종업원 등이 마음을 달래기 위해 모여드는 곳이었다. 르느와르는 이들이 흥겹게 춤을 추는 모습을 화폭에 담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종종 이곳을 찾곤 했다. 그는 모델을 구할 목적으로 그 곳에 온 여자들에게 말을 걸어보다가 나중에는 정말로 연민을 가지고 그녀들이 사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림 속의 여자들은 대부분 열두 살부터 공장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하며, 아주 작은 아파트에서 홀어머니와 함께 살거나 아니면 어머니의 애인까지 셋이서 함께 지냈다. 이들은 오직 열심히 일해서 생활형편이 나아지길 바랐으며, 좋은 남자를 만나 멋진 사랑을 하고 예쁜 집에서 오순도순 살게 될 날을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거칠었다. 그녀들의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이거나 어머니를 버리고 집을 나가버린 경우가 많았다. 어떤 여자는 너무 어린 나이에 매춘 중매인에게 속아 착취를 당하고 나이답지 않게 조숙해져 버렸고, 또 어떤 여자는 자신을 사랑해주지도 않는 남자의 아이를 가져 불룩해진 배로 체념한 채 살고 있었다. 그녀들에게 사랑은 거짓이거나 잠깐 스쳐지나가는 꿈같은 일일 뿐이었다.

하지만 르느와르의 그림 속에서 미소 띤 모습으로 춤을 추고 있는 여인들은 그런 거친 현실의 이면을 조금도 내비치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댄스홀을 멀리서 비추고 있었을 달빛과 그림 속에 가득한 둥근 가스등 불빛 때문이었을 것이다. 19세기 초반 유럽에 출현한 가스등은 밝기가 한결같은 오늘날의 전기등과는 달리 불꽃이 어른거리면서 안개처럼 은은하게 주변을 비추었으며, 새벽녘에 불꽃이 꺼져갈 때에는 마치 생명체가 스러져가듯 서서히 이지러지는 특징이 있었다. 가스등은 밤의 푸근한 정서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암울한 암흑의 어둠을 밝혀 주었다. 그것은 아련한 추억 속의 그리움 같은 분위기로 그 장소 안에 있는 사람과 사물을 화사하게 비추어 주었다. 가스등 불빛 아래 누추한 차림새는 유리장에 진열된 멋진 옷처럼 보였고, 늙수그레하고 초췌한 애인의 뺨은 물오른 살구빛으로 보였다. 모두가 한껏 사랑 받고 사랑하는 모습이었다. 르느와르가 바라본 것은 바로 그런 불빛 아래의 환상이었던 것이다.

아름다움도 환상이고 사랑도 결국엔 환상일 수 있다. 인생이라는 현실도 많은 부분은 환상의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환상은 순간일 뿐일지라도 허무하지만은 않다. 잠시나마 누렸던 행복은 이미 그 사람의 것으로 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황홀한 사랑을 약속하던 불빛이 꺼지고 나면, 그림 속 여인들은 하나둘 말없이 허름한 일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지금의 그 사람은 여기저기 상처만 남아있는 가엾던 그 사람이 아니라, 조금은 행복해진 달라진 사람이다. 초라한 일상 속에 기억할만한 좋은 순간이 몇 분이라도 있었다면 그것에 감사해야 한다. 힘들 때마다 꺼내어 되뇔 수 있는 좋은 기억이란 마음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환상에 빠져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거짓 주문을 걸거나 다른 사람들을 그 거짓 속에 끌어들인다면 문제가 심각하겠지만, 사실 환상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때론 환상 속에 숨는 것이 슬픔을 잊는 묘약이 될 수도 있다.

창백한 형광등을 끄고,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달이 어디 걸려 있나 내다보았다.
노랗고 탐스러운 달이 아파트 꼭대기에도 떠있고 마음속에도 떠있다. 내일 밤엔 비가 와서 달빛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저 달빛은 이미 이만큼 가득 풍부하게 필자의 마음을 채워주었다. 등려군의 노래와 함께….

/myjoolee@yahoo.co.kr

■사진설명=빈센트 반 고흐, '슬픔', 1882, 연필과 흑색 분필, 44.5x27㎝, 월솔 미술관(위쪽 작품). 오귀스트 르느와르,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의 댄스', 1876, 캔버스에 유채, 130.7x175.3㎝, 오르세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