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는 거대한 책장(가로 7m, 세로 3.2m, 폭 32㎝)이 서 있는 것 같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해리포터도 있고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린 바이블도 있다. 그뿐이 아니다. 훈민정음도 있고 민화도 있으며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모딜리아니도 있다. 박물학 지식의 보고라 할 만한 책 1000권이 벽면 전체를 장식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책 모양의 서랍을 자세히 보니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것도 머리카락 같은 미세한 붓으로 그린 극사실화다. 신기해 서랍을 열었더니 그 안에는 고고학자가 책에 그린 인물의 유적을 발굴한 듯 몇 겹의 레진으로 반투명하게 처리한 작품이 튀어나온다. 실제 여닫을 수 있는 300개의 서랍에는 이처럼 책의 내용과 관련된 그림이나 소품이 가득히 들어 있는데 다름아닌 우리 시대의 ‘추억’이다. 예컨대 중생대 책 속에는 공룡뼈나 화석이 있고 불운의 화가 모딜리아니의 서랍장 속에는 그의 마지막 연인 잔 에뷔테른을 그린 그림이 들어 있다.
관람객이 직접 손으로 만지고 추억을 꺼내볼 수 있도록 한 점이 다른 전시회와는 다르다. 처음엔 작품의 크기에 놀라고 다음엔 관람객에게 손으로 만지게 하는 ‘내 서랍 속의 자연’의 작품 가격(20억원)에 놀란다.
충남 천안시 신부동 아라리오갤러리(041-551-5100)에서 오는 5월 18일까지 열리고 있는 ‘이진용 개인전’의 대표작 ‘내 서랍 속의 자연’ 이야기다. 책 이미지들은 중생대, 백악기, 에디슨 등 자연 과학사에서부터 로댕, 고흐, 피카소 등의 작가의 책, 그리고 인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작가가 제주도에 있는 아라리오 스튜디오에서 하루 18시간씩 8개월 동안 완성한 작품이다.
이진용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수집 목록품들을 살펴봐야 한다. 축음기, 고서, 시계, 가방, 타자기, 카메라, 오리 등 웬만한 박물관의 유물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그의 그림은 그가 수집한 이러한 물건들과 많이 닮아 있다. 오래되어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낡음이 오히려 아름답고 멋스러운 물건들이다.
이영주 큐레이터는 “오래된 물건에서 풍기는 잔잔하면서도 따스함은 그의 작품에서 재현된다. 특별히 입체조각 위에 색칠을 하여 오래된 물건과 똑같이 만들어진 조각작품들을 보면 어느 것이 수집품인지 어느 것이 그의 작품인지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정교하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이진용의 작품은 관람객을 추억으로 이끄는 매력이 있다. 디지털 시대에 볼 수 없는 사라져 가는 물건들을 커다란 캔버스에 회화로 옮기거나 큰 조형물로 만듦으로써 아날로그의 따스함을 선사하는 것이다.
한편 이번 전시는 ‘내 서랍 속의 자연’ 이외에도 ‘게르하르트 리히터’ ‘세자르’ ‘뉴욕풍경’ 등 극사실적인 평면 회화 20여점도 선보인다.
회화 작품에는 모두 레진으로 만든 여백판이 이어져 있는데 작가는 어느 한쪽에 몰두하면서도 그걸 거부하는 존재도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란다. 특히 ‘뉴욕풍경’은 뉴욕의 거리 풍경을 배경으로 화면 앞을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노란 택시가 보인다. 풍경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 않고 ‘한 순간’의 이미지를 전달하는 작품이다.
/noja@fnnews.com 노정용기자
■사진설명=이진용의 ‘내 서랍 속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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