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미술평론가 윤진섭의 문화탐험] <3> 데비 한,동서양 미의 척도에 대한 질문



■머리는 비너스,몸은 한국의 여인

브레드 피트가 불세출의 명장 아킬레스로 분(扮)한 ‘트로이’는 에게해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그리스와 트로이 간의 10년에 걸친 싸움을 다룬 전쟁영화다. 호머의 대서사시 ‘일리아드’에 나오는 트로이 전쟁은 인간의 질투심이 도화선이 되었다.

절세의 미인 헬레네를 두고 벌어지는 영웅들 간의 싸움이 바로 ‘트로이’다. 그녀의 남편은 그리스의 왕 아가멤논의 동생인 메넬라오스. 그러나 트로이의 왕자인 파리스에게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기자 화가 난 메넬라오스가 형인 아가멤논에게 복수를 부탁하면서 트로이 전쟁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전쟁의 발단은 피터 폴 루벤스(1577∼1640)가 그린 ‘파리스의 심판’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에서 비롯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포세이돈을 섬기는 테티스와 모든 신들의 왕인 제우스가 지명한 펠레우스가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그 결혼식에 질투의 화신인 에리스가 초대를 받지 못했다.

그러자 화가 난 그녀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는 문구가 적힌 황금사과를 결혼식장에 던졌고, 이 사과를 빌미로 마침내 자신들이 최고의 미녀라고 생각한 헤라와 아프로디테, 아테네 사이에 싸움이 붙게 되었다. 이 싸움의 중재자는 당연히 신들의 왕인 제우스. 골치가 아팠던 그는 심판관으로 트로이의 왕자인 파리스를 초대했고, 파리스는 고심 끝에 자신을 뽑아주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를 선사하겠다고 약속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가장 아름다운 여신’으로 낙점했다. 그래서 선물로 받은 여인이 바로 헬레네였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로마식 이름이 바로 ‘비너스’다. 그리스 고전기 조각의 걸작인 밀로의 비너스는 벨베데레의 아폴로와 함께 이상적인 인체비례로 유명하다. 즉, 고전기의 걸출한 조각가인 폴리클레이토스가 ‘표준율(canon)’이라고 부른 황금비율(0.618:0.382)이 적용된 것이다. 이는 비너스 상의 머리에서 배꼽까지가 전체 신장의 0.382, 배꼽에서 발끝까지가 0.618에 이르는 비율이다.

데비 한은 서양 미인의 전형으로 알려진 이 비너스를 패러디한 작품을 발표하면서 일약 유명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비너스의 얼굴에 전형적인 한국 여인의 몸을 합성한 일련의 사진 작품들을 발표했던 것이다. 그녀의 ‘여신들’ 시리즈는 미인에 대한 서구적 기준을 해체하려는 의도에서 제작된 것이다. 이 당찬 구상은 한국을 비롯한 동양의 문화와 사회를 바라보는 그녀의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 이른바 팔등신이라는 말과 함께 얼굴을 삼등분하는 서양의 고전적 미인의 신체 조건에 대해 의문을 던짐으로써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미의 기준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걷는 삼미신’(100x220㎝, 2007년 작), ‘인사하는 여신’(115x220㎝, 2007년 작), ‘두 여신’(140x120㎝, 2007년 작), ‘수줍은 여신’(100x220㎝, 2007년 작), ‘자위하는 여신’(100x220㎝, 2007년 작), ‘일상의 비너스Ⅱ-생각하는 여신’(110x220㎝, 2007년 작) 등 일련의 ‘여신들’ 시리즈는 일상에서 볼 수 있는 한국의 평범한 여인들의 몸짓과 자태를 조각화한 것이다.

이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데비 한은 자신의 눈길을 끄는 여성들을 섭외하여 포즈를 취하게 하고 이를 사진에 담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의 말에 따르면 서양의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미인들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여인들의 몸을 통해 ‘평범한 삶 속의 아름다움’을 포착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녀는 그 같은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컴퓨터 합성기술과 편집 도구를 활용하여 여성의 몸을 마치 조각품처럼 보이게 정교하게 다듬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머리는 비너스요, 몸은 한국 여인인 ‘여신들’ 시리즈다.

데비 한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포즈를 통해 서구와는 다른 한국의 문화와 사회적 관습에 대해 발언을 한다.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그 곳의 사회에 익숙한 그녀는 말하자면 두 문화권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다.

‘걷는 삼미신’을 통해 그녀는 질문을 던진다. 서양에서는 금기시되는 여자들끼리의 팔짱이 왜 한국 사회에서는 친숙한 몸짓으로 통용되는가? ‘인사하는 여신’을 통해 그녀는 묻는다. 백화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안내원의 공손한 인사는 왜 서구 사회에서는 볼 수 없는가? ‘수줍은 여신’을 통해 그녀는 의문을 던진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부끄러운 듯 내숭을 떠는 저 여성과 유사한 자태를 왜 서양의 여성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가?

데비 한이 의문을 던지고 있는 것처럼, 몸은 특정한 국가나 민족의 문화와 사회적 관습을 재는 척도다. 그것은 코드화돼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몸짓이나 동작을 통해 그 나라의 사회적 관습과 문화적 특징을 읽는다. 가령, 어린 사내아이의 고추를 만지는 행위가 한국 사회에서는 친밀감의 표시로 간주되지만, 미국 사회에서는 성희롱에 해당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또 티벳이나 뉴질랜드의 마오리 족에게는 혀를 내미는 것이 인사에 해당하지만, 한국인들은 민망한 처지에 처했을 때 혀를 쏙 내민다. 한국인들은 개고기를 최고의 보양식으로 치지만, 프랑스의 여배우 브리짓드 바르도는 그런 한국인들을 공개적으로 야만인 취급을 해서 빈축을 산 바 있다.

미인에 대한 기준도 마찬가지로 종족에 따라 서로 다르다. 아프리카의 어떤 부족은 목이 길수록 미인으로 간주해서 심지어는 30㎝나 되는 긴 목을 가진 여성이 있다. 이 부족은 미인을 만들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목에 꽉 죄는 링을 겹겹이 끼워 넣는다. 아프리카의 또 다른 부족에게는 미인을 만들기 위해 어려서부터 흙으로 만든 원반을 여성의 아랫입술을 째고 끼워 넣는 풍습이 있다. 원반은 나이가 들수록 크기가 커져 심지어는 직경이 10㎝가 넘는 경우도 흔하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인 마빈 해리스(1927∼)는 ‘문화의 수수께끼’라는 저서를 통해 문화의 상대주의를 주장한다. 미의 절대적인 조건이 존재하지 않듯이, 문화의 절대적인 가치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데비 한이 펼치는 몸의 담론은 그래서 우리의 눈길을 끈다.

/yoonjs053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