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세계에선 1등만 기억된다는 말이 있다. 1등의 눈물이 환희의 산물이라면 2, 3위의 눈물은 아쉬움의 산물로 비쳐지고 금메달리스트를 향해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진다. 그러나 올림픽 무대에서 시상대 맨 꼭대기에 선 선수들이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은 그들과 선의의 경쟁을 펼쳤던 은, 동메달리스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단은 금메달 만큼 값진 동메달 8개를 수확해냈다. ‘우생순(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감동을 전한 여자 핸드볼 대표팀을 비롯, 내분을 딛고 단체전 동반 동메달을 따낸 남녀 탁구 대표팀 등 모두가 비인기 종목의 설움과 열악한 훈련 환경을 딛고 단상에 선 베이징의 영웅들이었다.
# 내분을 딛고 새로운 희망 건졌다: 탁구 남녀 대표팀
“금메달 못지 않은 의미있는 동메달입니다.”
지난 17일과 18일 2008 베이징올림픽 탁구 단체전에서 남녀 동반 동메달을 목에 건 한국 탁구 대표팀(오상은, 유승민, 윤재영 이상 남자, 김경아, 박미영, 당예서 이상 여자)은 경기 직후 감격의 포옹을 나누며 동메달을 따낸 기쁨을 표현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유남규(남자 단식), 현정화-양영자(여자 복식)가 2개의 금메달을 따낸 이래 아테네까지 총 3개의 금메달을 목에 건 사실을 떠올린다면 베이징올림픽에서 받아든 동메달 2개란 성적표는 추락으로까지 비춰질지 모르지만 탁구 대표팀의 심정은 달랐다. 올림픽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시점에서 탁구계가 심각한 내분에 휩싸이며 훈련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상황을 딛고 따낸 값진 동메달이었기 때문이다.
탁구 여자 대표팀을 이끈 현정화 코치는 “1달 밖에 호흡을 맞추지 못하는 힘든 과정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이 모든 역량을 쏟아 부어 값진 메달을 따냈다”라며 “올림픽 이후 4년 내지는 8년의 장기 계획을 세워 훈련에 임하겠다”고 감회 어린 소감을 밝혔다.
내분을 딛고 일어서 얻어낸 그들의 메달은 비록 금빛이 아닌 구릿빛이었지만 탁구계의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 8년만에 값진 메달 선사: 女 유도 78kg급 정경미
▲ 정경미 |
올해 23세로 창창한 나이인데다 태권도와 투포환을 하다가 유도로 전향해 단단한 체력을 자랑하는 정경미는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 3위, 올해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정상에 오른데 이어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목에 거는 등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어 2012년 런던올림픽에 대한 희망을 밝혔다.
# 노메달 위기 구한 간판 스타-레슬링 그레코로만 55kg 박은철
그레코로만형 55kg급에서 동메달을 따낸 박은철(27·주택공사)은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부터 계속된 금맥을 잇는데 실패하며 24년만에 처음으로 노 메달의 위기에 처했던 한국 레슬링계를 위기에서 벗어나게 한 주인공이다.
4강에서 러시아의 나지르 만키예프에게 일격을 당해 금메달의 꿈을 날렸지만 3-4위전에서 ‘천적’ 하미드 수리안 레이한푸르(이란)를 2대 0으로 꺾으면서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 이어 올림픽 2회 연속 동메달을 목에 건 그는 동구권 국가들의 초강세 속에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 한국 레슬링계의 구원 투수로 확실한 자리매김을 했다.
# 부상 딛고 금메달보다 깊은 감동 선사-복싱 69kg급 김정주
▲ 김정주 |
지난달 훈련 도중 왼손 손등 뼈에 금이 가는 부상을 당했던 김정주는 이번 올림픽 1회전(32강전)에서 경기를 펼치던 도중 왼손 부상이 재발되며 어려운 경기를 펼쳤지만 준결승을 앞두고 왼손에 마취 주사를 4방이나 맞고 링에 오르는 투혼을 보여준 끝에 값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1988년 김광선, 박시헌 이래 20년 만에 올림픽 금메달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올림픽 2회 연속 동메달을 따내는데 만족해야 했던 김정주는 아쉬움에 고개를 떨궜지만 부상에도 굴하지 않았던 그의 투혼은 금메달보다 깊은 감동을 줬다.
# 한국 양궁의 차세대 대들보로 우뚝-여자 양궁 개인전 윤옥희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이후 여자 단체전 6연패를 달성한 여자 양궁대표팀은 비록 이번 올림픽에서 개인전 7연패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2004 아테네올림픽의 박성현(25·전북도청)에 이어 베이징에서 윤옥희(23·예천군청)라는 걸출한 스타를 탄생시키는 경사를 맞았다. 여자 단체전의 금메달을 일조한데 이어 개인전에서 동메달을 목에 건 윤옥희는 지난 5월 여자 개인전 부문 세계신기록(119점, 만점은 120점)을 세운데 이어 이번 올림픽에서의 활약으로 한국 여자 양궁의 차세대 대들보로 우뚝 섰다.
# 성공적인 세대 교체 주역- 男 배드민턴 복식 이재진-황지만
▲ 이재진·황지만 |
# ‘우생순’은 영원하다- 女 핸드볼 대표팀
구릿빛 감동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한 주인공은 23일 여자 핸드볼에서 동메달을 따낸 여자 핸드볼 대표팀. 준결승전에서 심판의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인해 노르웨이에 1점차로 분패한 뒤 동메달 결정전에 나선 선수들은 동유럽 강호 헝가리를 상대로 접전을 펼친 끝에 33대 28로 물리치며 감동 어린 동메달을 선사했다.
오성옥(36·하포방크)을 비롯, 오영란(36·벽산건설), 홍정호(34·오므론) 등 평균 나이 34세가 넘는 노장 선수가 주축이 된데다 국내에 실업팀 조차 없어 해외로 떠돌며 훈련을 해야 했던 상황을 딛고 이뤄낸 값진 성과.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금 2, 은 2, 동 1개를 일궈낸 쾌거였다.
은퇴와 복귀를 반복하며 여자 핸드볼 지키기에 앞장섰던 주장 오성옥은 경기 후 “눈물이 날 정도로 힘든 훈련을 했는데 이런 고생이 헛되이 되면 안된다는 마음으로 뛰었다”라며 “올림픽이 끝나면 핸드볼의 인기가 사그라지고 기업에서도 팀을 창단한다는 얘기를 했다가 시간이 지나면 없었던 일이 된다.지금 받고 있는 관심이 꾸준히 이어져 후배들이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도움이 절실하다”고 호소해 다시 한번 심금을 울렸다.
/easygolf@fnnews.com 이지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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