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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깔모자와 황금날개] <14> 자기 자신과의 게임 ①



■글: 박병로 ■그림: 문재일
스팀 다리미, 잡화, 구두와 운동화, 만능 공구세트, 보온시트커버에서 방향제, 액세서리 장식품에 이르기까지의 자동차용품들….

점심시간이면 여느 할인점 못지않게 다양한 상품들을 가져와 늘어서는 무교동 먹자골목의 반짝시장에 모처럼 햇볕이 다사로웠다. 길 위에 늘어놓았지만 볕이 좋은 이런 날은 영어 회화 교재 카세트를 제외하고는 물건들이 제법 눈길을 끌었다.

황인성은 서성거렸다. 그것은 혼자 하는 게임이었다. 10년 이상 이 길을 산책하는 배민서가 오늘 ‘지나간다’에, 그는 DS지오텍 프로젝트를 걸었다. 빤히 이기는 게임이지만 순간순간 초조했다. 동시에 그를 만난다는 생각을 하자 설레었다. 친구라서가 아니라 배민서는 괜찮은 작가였다. 인기나 대중에 영합하지 않고 묵묵히 삶의 진정성을 찾는 글쓰기를 하고 있었다. 그가 이 먹자골목을 산책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오피스빌딩에서 쏟아져 나온 사무직원들의 배부른 모습에서 그는 영감을 얻고 싶어 했다.

한 순간, 이십대 후반쯤 돼 보이는 여자가 다가왔다.

“혹시 기억하시겠어요?”

어디서 봤을까. 몸에 꼭 끼게 입은 검은 레깅스 바지와 짧은 치마, 흰 폴로셔츠와 털 스웨터가 희고 작은 얼굴에 잘 어울렸다. 미간에 걸치듯이 내려온 붉은빛이 도는 한 줌의 애교머리를 바라보는 순간 황인성은 붙박인 듯 시선을 정지시켰다.

“선생님 맞으시죠? 아까부터 곁에 서 있었는데 못 알아보시네요.”

벌써 4년이 지난 일이었다. 신혼부부들 속에 끼어 다녀온 4박 5일 동안의 캐나다 여행에서 만난 여자였다. 왜 기억을 못하겠는가.

“여전히 좋은 일을 하고 사시네요!”

호객꾼들이 건넨 명함 쪽과 광고 선전물들을 주는 대로 받아들고 서 있다는 뜻이었다. 여전히는 무슨…. 황인성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카지노 노숙자를 면한 지금 그녀를 만난 것은 천만다행이다 싶었다.

“자그마하지만 분위기 괜찮은 가게라고들 해요.”

<보르도>라는 고딕 글씨가 쓰인 와인바 개업소개 전단이었다. 그녀는 4년 전처럼 젖어 있지는 않았으나 목소리에는 여전히 정이 많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빌딩 하나 건너 골목 입구에서 전단을 나눠 주고 있는 깍두기 머리 남자를 턱으로 가리켰다. 그 곁에 붉은 고깔모자를 쓰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괜히 발길질을 해대는 서너 살쯤 된 아이가 보였다.

“아들이로군요?”

여자가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20m쯤 앞에 배민서가 나타났다. 푸른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무거운 짐을 진 듯이 걸어왔다. 언제나처럼 보통 키에 왜소해 보이는 체구였으나 무테안경 속의 눈이 매서웠다.

“어? 이게 누고? 웬 놈이 길을 막아서나, 했다 아이가.”

짧은 순간 배민서의 표정에 경계심이 스쳐갔다.


“밥 때 여게 서 있다카는 기는 아직 밥 묵기 전이라는 기고…, 니 설마.”

배민서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설마 뭐? 그래, 밥 한 끼 얻어 무글라 카는 그지가 됐다, 와?”

장난삼아 배민서의 말투를 흉내내자 보르도 전단을 건네려던 여자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내리고 돌아섰다. 놀러 오세요. 들르세요. 그녀의 눈빛이 그렇게 말한 듯했으나 황인성은 뒤가 허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