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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아들 조용덕씨 찾는 이상순씨



“지난 세월 동안 저는 상상 속에서 아들을 키웠습니다. 길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도 딱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아요.”

31년 전에 잃어버린 아들 조용덕씨(37)를 찾는 어머니 이상순씨는 지금도 매일 새벽 2시쯤 잠이 깬다. 이씨의 시간은 용덕씨가 사라진 1977년 4월 10일에 멈췄고 그후론 깊은 잠을 잔 적이 없다.

“아들이 사라지기 약 한달 전 충북 제천시 영천2동으로 이사를 갔어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전화도 없었죠. 부엌이 딸린 방 한 칸을 마련해 사는 정도였는데 아이를 잃고 나니 정말 막막했습니다.”

당시 여섯살이던 용덕씨는 자신보다 네살 많은 사촌 누나와 놀러나갔다. ‘모래밭’이라 불리는 작은 공터에서 놀겠단 이야기를 남기고서다. 오후 2시쯤 나가 저녁밥을 먹을 때쯤 돌아온 사촌 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용덕이를 잃어버렸다’고 털어 놓았다.

“부모의 인생은 그순간 산산조각이 났죠. 지금처럼 실종 아동을 찾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아 충청북도 일대의 경찰서를 일일이 두 발로 걸어다니며 신고를 했습니다.”

조씨가 사라진 곳은 시외버스 정류장과 기차역이 가까운 곳이다. 멋모르고 걸어나갔다 납치라도 됐다면 먼 곳으로 끌려갔을 확률이 높다. 마침 비슷한 시기에 조씨 또래의 남자아이가 또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이래저래 가슴은 타들어갔다. 조씨는 또래에 비해 말이 좀 늦긴 했지만 기본적인 의사 표현은 할 줄 아는 아이였다. 뽀얀 피부에 눈웃음이 예뻐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나의 살던 고향’을 곧잘 불렀다. 조씨가 지닌 신체적인 특징은 입술 옆의 찢어진 자국뿐이다. 이씨는 ‘흉터라고 해도 무척 작아 부모나 돼야 알아볼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전국에 있는 아동보호시설 355군데를 뒤지고 다녔습니다. 공중파 방송국의 도움을 받기도 했고요. 제보야 많았지만 매번 허탕을 쳤습니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됐으니 시·도교육위원회에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어딘가에 살아 있다면 학교에 들어갔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각 학교마다 사진을 뿌렸고 연락을 기다렸다.

누군가는 근처 나병환자촌을 찾아보라 일렀다. 그곳에서 험한 일이라도 당했을까 애를 태우며 사흘간 잠복했다. 그마저도 소용이 없자 무속인의 힘을 빌렸다. 굿도 하고 점도 수없이 봤다.

“어느 순간부터는 우리 아이가 해외에 있다고 하더라구요. 입양된 게 아닐까 싶어 ‘언젠가 한국에 돌아와 나를 찾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씨는 부모의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 이사간 지 얼마되지 않아 실종됐기에 집에 관한 기억도 전혀 없을 거라고 이씨는 걱정한다.


“네 살 터울의 누나가 있는데 부모 이름은 몰라도 ‘조유정’이라는 누나 이름은 기억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씨는 현재 인천에 살고 있다. 조씨를 잃어버렸을 때보다 먹고 사는 건 많이 나아졌지만 정신이 피폐해졌다고 털어놓는다.

“너무 힘든 세월을 살아와서인지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감각해졌어요. ‘나만큼 슬픈 사람이 어디 있어’라는 생각으로 가득차 메마른 인생을 살고 있는 게 무척 괴롭습니다.”

/wild@fnnews.com 박하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