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고깔모자와 황금날개] <180·끝> 꿈꾸는 자들의 부활-20



■글: 박병로 ■그림: 문재일
“내 고문변호사와 회계사를 찾아가 보라는 얘길 기억하나? 유효하네. 몇 가지 조건이 있지만 자네가 거절할 만큼 까다로운 것은 아니야.”

“잘 알겠습니다.”

그 조건이 무엇인지 궁금했으나 필립은 묻지 않았다. 언젠가 목숨이 경각에 달릴 만큼 급할 때가 된다면 알게 될 것이었다.

“코스닥 기업을 잘 찾아봐. 거기에도 수십 가지 돈 버는 길이 있어. 다 쓰러진 회사의 주식 워런트를 사서 회생시켜보는 것도 한 방법이지. 아이디어가 있고 추진력이 있다면 죽은 회사인들 살려내지 못하겠나.”

빚을 탕감하지는 못했으나 홀가분했다. 상환일을 무기한 연장했고 돈을 벌어야 할 목표가 그것으로 분명해졌다. 생명의 기쁨 재단 사무실을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 딩동하고 문자메시지 도착 신호음이 들렸다.

“명동성당으로!”

노이만이었다. 팀원들과 함께 성모상 앞에 모인다는 뜻이었다. 하기야 로그아웃하기에 그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었다. 그들과 오프라인에서 처음 만난 것도 명동성당이었다. 필립이 번개를 날렸을 때 그들은 자살한다는 메시지로 알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거기서 결의했고 거의 9개월여를 한뜻으로 달려왔다.

명동성당의 성모상은 언제나처럼 온화했다. 필립이 막 성호를 긋는 순간 익숙한 오프라 팰리스의 향수냄새와 오시리스의 구린 입냄새가 났다. 그러고 보니 어느 사이 팀원들이 다가와 빙 둘러싸고 있었다.

필립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자 노이만이 노란 캡슐을 하나씩 건넸다.

“3억여원을 남겼으니 지금 죽어도 살아남은 자들에게 폐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노이만이 그렇게 말하고 필립을 건너다보았다.

“이런 방식으로 로그아웃을 한다는 게 참 유치하네요. 그렇지만 홀가분하고 경이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아무도 도망가지 않고 여기 모인 게 말입니다.”

필립은 눈을 지그시 감고 캡슐을 입에 넣었다. 노이만이 연구해 낸 로그아웃 방법이 이것이었다. 노이만이 한 순간 다른 마음을 먹었다면 캡슐 안에 독약을 넣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김순정은 억울한 일이었다.

“순정씨는 열외입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노이만이 생수와 함께 캡슐을 삼켰다. 오시리스, 강일남, 오프라 팰리스의 순으로 모두 약을 삼켰다. 제발, 죽음과 패배의 순환 고리가 이렇게 해서 끊긴다면 얼마나 좋을까.

숙연해진 가운데 노이만이 성호를 긋고 돌아섰다. 명동으로 가는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하자 오시리스부터 순례자들처럼 차례로 뒤를 따랐다.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없이 지켜보던 김순정이 깊이 파인 가슴골에 손가락을 넣어 무엇인가를 꺼냈다.

바삭. 미세하게 바스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김순정의 발에 보라색 액체와 투명한 앰플 파편이 밟혔다.

“내레 이자 남조선을 떠나야 함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김순정이 필립 곁에 붙어 섰다. 남조선이라는 단어와 어투 때문일까. 유엔의 대북경제제재로 여의도에 들어와 있을지도 모르는 북쪽의 투기자금도 동결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와 섹스를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보통사람이 재벌급 부자가 되는 거 어렵지 않아. 다른 방법으로 제대로 한번 보여줄게, 다시 와.”

그랬다. 아직 시도해 볼 만한 사업 아이템이 부지기수였고 필립은 아직 젊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