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종원교수의 뮤지컬,영화에 빠지다] 나인,예술가의 고통 그린 ‘흥행작’

아홉이란 숫자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두 자리로 부르기엔 하나의 아쉬움이 있으면서도 그 존재 자체는 거의 가득한 상태다. 이 아슬아슬하면서도 풍만한 숫자가 뮤지컬 영화로 막을 올렸다.

요즘 가는 곳마다 포스터를 만날 수 있는 신작 영화 ‘나인(Nine)’이다. 뮤지컬이 영화와 만나 관객들의 발길을 유혹하는 가장 최근의 관심작이다.

일반 관객들에겐 낯설지 모르지만 뮤지컬 마니아들에게 ‘나인’은 사실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는 검증된 흥행작이다. 1982년 브로드웨이에서 처음 공연을 시작해 2년여에 걸쳐 729차례나 연속 공연됐던 화제작이기 때문이다.

‘그랜드 호텔’ ‘타이타닉’ 혹은 앤드루 로이드 웨버와 다른 버전의 ‘유령’으로 유명한 작곡가 모리 예스톤이 음악을 만들고 안무가와 무용수, 연출가와 배우 등 다방면에 걸쳐 다양한 업적으로 유명한 다재다능한 무대예술가 토미 튠이 연출을 맡았었다.

새로운 작품을 만들 때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예술가의 고통을 유명 영화감독의 모습에 빗대 상징적으로 표현한 이 작품은 화려하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를 무대로 구현해 내 그해 토니상 10개 부문의 후보작으로 올라 최우수 뮤지컬상, 연출상, 작곡상, 여우조연상, 의상디자인상 등 5개상을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물론 영화 ‘시카고’로 21세기 새로운 뮤지컬 영화의 흥행 시대를 개척한 롭 마셜이 왜 이 작품을 차기작으로 선택했는지도 이해할 만하다. 제작사 입장에서는 유명 원작의 브랜드 파워가 플러스 요인이었을 테고 영화감독에게는 도전해 볼 만한 가치를 지닌 시대의 명작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뮤지컬의 시작도 사실 스크린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뮤지컬 ‘나인’은 슬픈 눈빛의 여인 젤소미나로 유명한 ‘길(La Strada)’의 영화감독인 페데리코 펠리니가 1963년에 발표했던 자전적 영화 ‘8½’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작품이다.

새로운 영화의 제작을 앞두고 아이디어의 고갈로 좌충우돌하는 영화감독의 모습은 사실 펠리니 감독이 예술가로서 겪는 스스로의 고뇌를 투영시킨 것이었는데 10대 시절 우연히 영화를 본 모리 예스톤은 창작의 고통에 대해 십분 공감할 수 있어서 뮤지컬 제작을 구상하게 됐다는 후문이다.

펠리니의 영화 제목은 그가 만든 영화의 편수를 의미한다. 이 작품 이전에 그는 6편의 장편영화와 2편의 단편영화 그리고 1편의 공동 연출작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를 합해 8과 ½이라는 숫자가 탄생됐다는 해석이다.

뮤지컬의 제목이 ‘나인’이 된 것도 펠리니의 영화에 뮤지컬 음악이라는 ½의 창작 작업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작품 안에서 숫자 아홉은 다양한 의미와 모티브들로 등장하는데 그래서 마치 의식의 흐름 수법처럼 주인공의 심리를 따라 유영하듯 극적 전개가 이어지는 매력이 더해지기도 했다.

유명 뮤지컬들이 그렇듯이 ‘나인’도 세계 각지에서 여러 차례 리바이벌되며 인기를 누려 왔다. 영화와 달리 무대는 다시 막을 올릴 때마다 새로운 해석과 연출의 첨삭이 가능한 탓에 무대용 뮤지컬의 진화는 마니아들에겐 늘 초미의 관심사이자 매력적인 유혹이 됐다.

아마도 가장 성공적이었던 버전은 2003년 막을 올려 1년여 동안 283회 연속공연을 기록한 브로드웨이 유진 오닐 극장의 무대라 할 수 있는데 특히 바람둥이 귀도 역으로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등장해 특유의 카리스마를 선보였다(심지어 그가 무대를 떠난 이후 급격한 매출 감소를 기록했을 만큼 작품 안에서의 그의 이미지는 절대적이었다).

‘나인’의 영화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뮤지컬 애호가들은 대형 스크린을 통해 만나는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귀도’ 연기를 기대했지만 정작 스크린에 등장한 것은 그가 아닌 대니얼 데이 루이스다.

장르를 넘나들 때는 ‘원 소스’가 아닌 ‘멀티 유즈’에 방점을 둔다는 현대 문화산업의 부가가치 창출 공식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적용됐다. 근작 리바이벌 무대에서 남자 주인공의 카리스마를 적극 활용하는 연출을 선택했다면 영상화된 영화에서는 반대로 여주인공들의 매력을 전면에 내세우는 파격의 재미를 추가한 셈이다.

덕분에 국내 개봉을 전후로 배포된 우리나라 영화기획사의 홍보자료는 뮤지컬 영화 ‘나인’을 마치 한국영화 ‘여배우들’의 할리우드 버전처럼 포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파격의 재미는 원작을 이해할 때 비로소 극대화될 수 있음은 굳이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배우만 바뀐 것은 아니다. 영화는 무대와 차별되는 크고 작은 변화를 적극 활용했다. 무대에 등장했던 제작자 캐릭터 대신 영화에서는 매력적인 영화 기자가 나오고, 베니스의 스파 휴양지 대신 로마 주변의 관광지들이 펼쳐진다.

‘익숙하되 새로운’ 흥행 콘텐츠의 변신은 이미 무대를 경험한 관객들을 다시 영화관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적극적인 마케팅의 발현이기도 하다. 비슷한 변신을 꿈꾸는 제작자들에게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 ‘영악한’ 전술적 선택이다.

‘나인’은 국내 무대에서도 소개됐었다.

배우 황정민을 전면에 내세웠던 우리말 버전의 흥행 실적은 그리 신통치 못했지만 막을 내릴 무렵에는 제법 많은 관객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특히 2막에 등장하는 클라우디아의 노래 ‘언유주얼 웨이(Unusual way)’는 조수미의 음반을 통해서도 꽤 인기를 누려 우리 대중에게 익숙한 뮤지컬 넘버다. 영화를 보러 간다면 귀기울여 감상해 보라 추천하고픈 이 뮤지컬의 대표적 히트곡이다.

/순천향대 교수·뮤지컬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