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한국인들이 가진 열정과 끼, 또 이것을 표현해 낼줄 아는 여성스러움과 내적 표현력이 한국적인 아름다움이다."
재일동포 2세로 대학 졸업 때까지 일본에서 성장한 최태지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은 1996년 최연소 국립발레단 단장에 취임한 이후 한국 발레의 대중화에 힘써 왔다. 정동극장 극장장 등 '외도'를 거쳐 2008년 7년 만에 다시 친정에 돌아온 최 감독은 이제는 한국 발레의 대중화와 명품화를 통한 세계화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지난달 13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그를 만났다.
―금융 위기, 신종플루로 공연계가 침체에 빠졌던 지난해 국립발레단은 오히려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는데.
▲드라마 발레 '신데렐라' '차이콥스키', 창작 발레 '왕자 호동'까지 발레단 사상 최대인 세 편의 신작을 무대에 올렸다. 지난 한 해 총 79회의 공연을 펼쳐 83%에 달하는 객석 점유율을 기록할 정도로 관객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모스크바 국제발레콩쿠르'에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찾아가는 발레를 통해 한국의 발레 대중화에 적극적인데.
▲대중들이 쉽게 발레를 이해할 수 있도록 수년 전부터 '해설이 있는 발레' 공연을 진행했다. 군부대, 초등학교 이외에도 문화적으로 소외된 전남 해남 땅끝마을 등도 찾아 공연을 선보였다. 사람들이 원한다면 어디라도 발레단을 이끌고 갈 것이다.
―클래식 발레의 본고장인 러시아에서 초청공연을 갖는다는데.
▲올해는 국립발레단이 해외 진출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해로 한·러시아 수교 20주년을 기념해 러시아 볼쇼이발레단과 주역 무용수들을 교류해 공연을 갖는다. 국립발레단 주역 무용수 10명이 오는 10월 러시아로 파견돼 볼쇼이발레단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주역으로 출연하고 볼쇼이 측의 무용수는 서울에서 공연되는 '레이몬다'에 참여한다. 이어 11월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도 공연할 예정이다.
―유럽 진출 등 한국 발레의 세계화를 본격 추진하는데.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러시아 이외의 유럽 공연도 추진 중이다. 그동안 중국, 폴란드 등지에서 공연해 높은 평가를 받은 적이 있지만 올해는 이탈리아, 프랑스 등 발레의 본고장에서 승부하며 세계로 뻗어나가는 발레단으로 첫발을 뗄 것이다.
―지난해 창작 발레 '왕자 호동'이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추가로 작품 계획은 있나.
▲여러 작품을 해서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것 보다는 기존 창작 발레인 왕자 호동의 완성도 업그레이드에 노력할 것이다. 그래야만 해외에서도 좋은 평가가 나올 것이고 우리의 발레 수준이 높아지는 것이다.
―발레단의 레퍼토리가 다양해지고 좋은 작품들이 많아졌는데 한국 발레의 위상이 높아진 것인가.
▲볼쇼이 예술감독이었던 유리 그리가로비치에게 부탁해 레퍼토리를 얻은 게 2000년이다. 그런데 작년 공연을 좋게 보았는 지 꼭 10년 만에 국립발레단을 볼쇼이 극장으로 초청했다. 볼쇼이발레단의 군무 속에서 솔리스트로 서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다. 국립발레단의 수준을 러시아에서도 인정한 것이다. 테크닉이나 실력으로 최고를 자랑하는 한국의 무용수들이 세계 유수의 발레학원을 졸업하고 콩쿠르를 휩쓰는 것을 보면서 본고장인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무용수들과 실력을 겨뤄도 손색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작년에 모스크바 콩쿠르, 발레 올림픽이라고 하는 세계 최고의 유명한 콩쿠르에서 이동훈, 김리회가 실버메달을 수상했다. 그때 심사를 맡은 러시아의 유명한 예술인이 '러시아의 발레가 이제 한국에 있는 것 같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난 1월 말 다보스포럼에서 '한국의 밤 2010 행사'가 외국 명사들의 갈채를 받았다는데.
▲국립발레단 주역 무용수인 김리회와 박세은, 박슬기가 국악, 타악 반주에 맞춰 '세계와 함께하는 아리랑-아리랑 포 투모로'를 춤췄다. 한국적 아름다움을 간직한 서양 발레 동작으로 벨기에 필립 왕세자 내외와 앙헬 구리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사무총장, 도미니크 바튼 매킨지 회장 등 전 세계 유력인사 800여명이 참석해 갈채를 보냈다.
―서양의 발레 동작에 한국적 아름다움을 어떻게 접목시키려고 노력하는지.
▲다보스포럼에서 공연한 아리랑의 이번 작품은 어깨선을 부드럽게 움직이며 한국의 곡선미를 살린 발레다. 미래 지향적인 아리랑 선율과 한국 고전무용 동작을 결합한 독특한 발레에 외국인들이 감동한 것 같다. 특히 '한(恨)'의 정서가 강한 아리랑을 보다 역동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정서로 전환시키려고 노력했다.
―한국의 아름다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한국, 한국인들이 가진 열정과 끼, 또 이것을 표현해 낼줄 아는 여성스러움과 내적 표현력이 풍부하다는 점이 한국의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다.
―2008년 25억원가량에 머물던 국립발레단 예산이 올해 100억원으로 껑충 뛰었는데.
▲가만히 있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완벽하지 않은 한국어로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예산을 따내려) 설득하는 건 후배들이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춤추고 국민에게 수준 높은 공연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올해 토슈즈 예산 1억4000여만원가량을 확보한 것은 단원들의 처우 개선에 의미 있는 변화다. 그동안은 발레의 기본이 되는 토슈즈에 책정된 예산이 적어 단원들이 좋은 토슈즈를 사기 위해서는 사비를 들일 수밖에 없었다. 작은 부분이지만 토슈즈를 바꾸는 데만 2년이 걸렸다.
―티켓가격을 20% 인하할 방침을 세웠다는데.
▲사실 발레 공연료가 일반인에게는 비싼 것이 사실이다. 예산이 늘어난 만큼 티켓 가격을 낮춰야 일반 관람객이 많이 찾아올 것이다. 5000원, 1만원짜리 티켓 판매 등 전체적으로 티켓가격을 20% 인하할 방침이다. 지난해 공연을 찾은 관객의 대부분이 일반인이었다. 올 한 해 국립발레단의 공연 관객 중 무용관계자는 불과 1, 2%에 불과했다. 95% 이상이 입소문을 타고 찾아온 일반관객이었다.
―올해 국립발레단 공연 계획은.
▲국립발레단은 올해 1월 '신데렐라', 2월 '차이콥스키'를 비롯해 '코펠리아'(4월 27일∼5월 6일), '트리플빌'(7월 15∼18일), '레이몬다'(9월 25∼30일), 12월에 올리는 '백조의호수', '호두까기 인형' 등 모두 7편의 전막 발레를 올릴 계획이다.
―재일동포 그리고 엄마. 한국 발레리나로서 두 가지 '악조건'을 모두 이겨냈다는 평가를 받던데.
▲10세 때 동네 발레 학원 선생님의 모습에 반해 발레를 시작했다. 다이어트 하기 위해 너무너무 어렵지만 '아 결혼할 때까지다'라고 하면서 절대로 결혼할 거다, 결혼하면 토슈즈도 다 던지고 다른 길을 갈 거라고 생각했다. 평생에 그냥 먹고 싶은 것 잘 먹을 수 있고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는 시기가 그 시기였던 것 같다. 첫딸을 낳고 78㎏까지 체중이 늘었다. 산후 우울증이 생겼고 발레가 간절해졌다. 당장 기초 연습부터 시작해 1987년 프리마 돈나로 무대에 돌아올 수 있었다.
―한국 발레의 미래를 평가한다면.
▲돈이 있고, 힘이 있는 나라가 문화도 번성한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오는 11월 한국에서 열리듯이 한국 발레도 발레 20국(B20)에 들어갈 수 있는 날이 멀지 않을 거라 확신한다. 그럴 만큼 우리의 수준도 높아졌다. 프랑스, 러시아 등 발레의 본고장 무용수들이 한국 발레는 이제 세계 시장에 내놔도 손색이 없다고 한다. 그말 뿌듯하고 기쁘지만 왠지 어깨가 무겁다. 그래도 잘할 거다. 한국 발레, 그 미래가 밝다.
/mskang@fnnews.com 강문순기자
■사진설명=최태지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오른쪽 첫번째)이 지난 6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단원들의 연기를 지도하고 있다. /사진=김범석기자
■최태지 예술감독은..
2008년 국립발레단 제6대 예술감독으로 임명된 최태지 예술감독(51)은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1968년부터 1980년까지 일본 가이타니 발레 아카데미에서 수학했다. 1983년 객원 무용수로 참가한 '세헤라자데' 공연으로 국립발레단과 첫 인연을 맺은 최 예술감독은 1987년에 정식 단원으로 입단, 1992년까지 프리마 발레리나로 활동했다
. 1993년부터 3년간은 국립발레단 지도위원. 1996년부터 2001년까지 국립발레단 제3대 예술감독으로 '해설이 있는 발레'와 같은 대중화 프로그램을 시작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유리 그리가로비치, 장크리스토프 마이요 같은 세계적 거장과의 작업을 통해 유리 그리가로비치 3부작 '호두까기인형' '백조의호수' '스파르타쿠스', 장크리스토프 마이요의 '로미오와 줄리엣' '신데렐라' 등을 레퍼토리로 확립했다.
또 적극적인 단원의 매니지먼트를 통해 국내 무용계 최초 스타마케팅을 정착함으로써 한국 발레가 오늘날 인기 장르로 자리 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스위스 로잔 국제발레콩쿠르, 모스크바 국제발레콩쿠르, 러시아 카잔 국제발레콩쿠르, 러시아 '브누아 드 라 당스' 등 유수의 대회에 한국인 최초 심의를 하며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아 2008년 파라다이스 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2009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에서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후원하는 '예총예술문화상' 무용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후 원: 문화체육관광부 한국관광공사 한국방문의해위원회
인터뷰 동영상 tv.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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