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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인찬의 팬텀오브더뮤지컬] 다시 본 ‘쓰릴미’

▲ 쓰릴미 (왼쪽 조강현/오른쪽 김재범)

2008년 7월에 처음 봤으니까 ‘쓰릴 미’를 거의 2년 만에 다시 봤다. 장소는 서울 충무아트홀에서 신촌의 ‘더 스테이지’로 바뀌었다. 250석 규모의 아담한 무대는 배우 2인에 피아니스트 1인, 모두 세명이 공연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박수는 커튼 콜 때 딱 한번 나왔다. 공연이 싱거웠냐고? 그게 아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관객들은 감히 박수를 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대신 커튼 콜 때 박수는 매우 열정적이었다. 공연 내내 참았던 박수를 한꺼번에 터뜨리기라도 한 것처럼.

‘쓰릴 미’는 묘한 매력이 있는 작품이다. 록 뮤지컬 ‘헤드윅’에 매니아층이 있는 것처럼 ‘쓰릴 미’에도 매니아층이 있다. 추종자를 거느린 작품들은 평범하지 않다. 아니 평범하지 않기 때문에 매니아들이 생겼을 것이다.

‘쓰릴 미’는 두 가지 점에서 평범을 거부한다. 주인공 ‘그’와 ‘나’는 동성애 관계다. 요즘 한 TV 드라마(‘인생은 아름다워’·김수현 극본)를 통해 동성애를 보는 우리 사회의 편견이 많이 누그러졌는지 모르지만, 여전히 동성애를 보는 대다수의 시선은 불편하다. ‘나’는 오로지 ‘그’를 소유하기 위해 ‘그’의 살인을 돕는다. 남녀 간 비극적인 사랑은 많이 봤지만 남남간 비극적인 사랑은 드물다. ‘쓰릴 미’는 남자에 집착하는 또 다른 남자의 극한 사랑 또는 집착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니체의 초인사상에 빠진 ‘그’가 오로지 스릴(Thrill)을 맛보기 위해 절도와 방화, 살인을 일삼는 것 역시 평범한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절도·방화만으론 성이 안 차니까 급기야 더 짜릿한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다. 그것도 어린아이를 유괴해서 염산을 붓는 잔인한 방식으로 말이다.

1920년대 미국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을 다룬 ‘쓰릴 미’는 가석방심의위원회가 34년 동안 수감 중인 ‘나’에게 살인 동기를 묻는 데서 시작된다. ‘나’의 대답은 이렇다. “동기요? 글쎄, 왜 내가 힘없는 어린애를 죽였을까요. 진실을 말씀드릴까요? 그건 ‘그’와 한 평생 같은 감옥에서 지내고 싶어서였어요. ‘그’는 자꾸 나를 떠나려 했거든요. 제 안경을 범행 현장에 슬쩍 떨어뜨린 것도 사실은 일부러 경찰에 증거물을 남긴 거죠. ‘그’는 이런 내 계획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요.”

상식과 논리의 잣대를 갖다대면 두 사람은 사이코다. 그런데 두 사이코가 매력을 풍기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여기에 ‘쓰릴 미’의 묘미가 있다.

조강현(‘그’)과 김재범(‘나’)의 공연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공연 내내 매끄러운 긴장이 감돈다. 막간 휴식없이 오직 두 사람이 1시간40분을 이끌어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자칫 밑천이 드러날 수도 있으나 조·김 커플은 막이 내린 뒤에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주인공이 둘이라는 말은 어쩐지 미안하다. 피아노가 있기 때문이다.
피아노는 ‘쓰릴 미’에 품위를 입히는 중요한 요소다. 그런 면에서 피아노는 제3의 주인공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때로는 고요한 호수처럼, 때로는 거센 파도처럼 가슴을 파고 드는 피아노 선율은 객석에 스릴을 자아낸다.

/paulk@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