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영국)=양재혁기자】 런던 시티 지역의 비숍게이트 스트리트 62번가. 웅장한 규모의 빌딩숲 한켠에 아주 작은 철제 간판만이 이곳이 유럽기후거래소(European Climate Exchange·ECX)임을 알리고 있다.
간단한 보안검사를 마치고 들어가보니 컴퓨터와 전화 몇 대만 놓여 있고 런던금속거래소(LME)의 웅장한 플로어는 찾아볼 수 없어 이곳이 전세계 최대의 탄소배출권이 거래되는 총본산임이 전혀 실감나지 않는다.
ECX 패트릭 벌리 사장은 "인터넷과 전화로 100% 거래가 이뤄지기 때문에 브로커들이 직접 만나는 실거래는 없다"고 말했다.
벌리 사장은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탄소배출권이 거래되는 모니터를 살펴보자고 제안했다.
탄소배출권 거래 플랫폼은 ICE선물거래소유럽이 쓰는 브렌트유, 가솔린, 천연가스의 한 탭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수많은 탭 가운데 'ECX Carbon'을 클릭하자 EUA, CER 등 탄소배출권들이 월별로 2010년 12월물부터 쭉 나열되어 있고 상품별로 비드, 오퍼의 숫자가 초단위로 빠르게 움직였다. 기자가 방문한 시간에는 EUA 2020년 12월물에 15.47유로부터 15.59유로까지 수많은 비드, 오퍼가격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는 "EUA 2010년 12월물이 가장 가까워서 가장 유동성이 많다"며 "전세계의 투자자들이 탄소배출권 상품에 투자하는 것이 ECX의 경쟁력"이라고 말했다.
■탄소배출권 거래 '산증인'
탄소배출권 거래의 역사는 국제사회의 '따뜻한 가슴'과 금융 전문가들의 '차가운 머리'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2000년대 초반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선진국들은 지구온난화, 환경보호 등의 글로벌 이슈를 다루며 탄소 저감에 합의했고 그 결과 탄소배출권을 도입키로 합의했다.
새로운 상품에 항상 목말라 있던 금융 전문가들은 탄소배출권을 거래한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장내거래소를 도입했다. 주요 상품 투자처였던 금, 원유, 납, 주석, 아연과 같이 탄소배출권도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해 여유있는 기업들로부터 필요한 기업이 배출권을 사들인다는 발상이었다.
탄소거래소가 환경보호론자들로부터 종종 "환경보호를 상업적으로 이용한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도 이같은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거래소를 통한 탄소배출권 거래가 활발해지는 이유는 개인들이 직접 거래하는 것보다 투명하고 정확한 가격정보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확한 가격정보를 이용해 탄소배출권 펀드, 탄소배출권 파생결합증권(DLS) 등 다양한 금융상품도 생겨났다.
ECX는 전세계 국가들의 탄소배출권 거래를 선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ECX는 지난 2005년 1월 유럽연합이 배출거래계획(ETS)을 선보이자 그해 4월에 거래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총량제한배출권거래(캡앤드레이드) 제도를 기반으로 유럽연합이 정한 유럽연합 탄소배출권(EUA)의 선물거래는 시작했다.
이후 2006년 10월에 EUA에 대한 옵션거래를 시작했다. 2008년에는 유럽을 포함한 전세계 지역의 교토 의정서 상의 청정개발체제(CDM) 사업을 통해 획득한 탄소배출권인 CER에 대한 선물, 옵션 거래도 시작했다. 거래량으로 치면 지난해 51억t의 탄소배출권이 이곳에서 거래됐고 거래대금은 680억 유로에 달한다.
■다음달 ICE와 통합 준비
ECX의 지위는 독보적이다.
현물거래에서 ECX는 전체의 40%, 블루넥스트(프랑스 파리)는 55%를 차지해 양분했지만 현물보다 10배 이상 큰 선물시장에서는 ECX가 99%의 시장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이밖에 유럽에너지거래소(독일), 그린익스체인지(미국), 시카고기후거래소(미국) 등 로컬 탄소거래소들이 5%를 차지하고 있다.
벌리 사장은 "우리는 탄소배출권 거래에만 집중하고 다른 상품을 취급하지 않기 때문에 시장 참여자들과 매우 강한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말했다. 거래소도 일종의 오픈마켓(시장)이기 때문에 참여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가격경쟁력 확보에 유리하다는 의미다.
ECX가 짧은 기간에 빠르게 명성을 쌓은 요인으로는 관계와 신뢰 두 가지를 중요한 점으로 꼽았다. 그는 "거래 및 청산결제 시스템, 규정은 모든 거래소가 쉽게 갖출 수 있지만 관계와 신뢰는 쉽게 형성되지 않는다"며 "시장 참여자가 많을수록 전세계의 컨퍼런스를 많이 다니면서 산업 종사자와 규제 담당자에게 탄소배출권 거래 절차를 교육시킨 결과"라고 강조했다.
요즘 ECX는 설립 5년만에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다음달 안에 브렌트유 거래로 유명한 국제상품거래소(ICE)와 합병을 추진하는 이유도 이런 이유때문이다.
벌리 사장은 직접 도표를 그려가면서 ECX의 미래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금융위기 이후 매도자와 매수자가 직접 만나 탄소배출권을 거래하는 것보다 거래소를 통하면 빠르고 정확하기 때문에 장외에서의 직거래는 줄어들고 기후거래소를 통한 거래는 계속 늘고 있다"며 "올 연말이면 탄소배출권 거래의 또 하나의 큰 시장이 탄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ECX가 ICE와 통합되면 아직 탄소배출권 거래가 취약한 북미 및 아시아 시장 공략에 적극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같은 그룹에 편입된 미국 시카고기후거래소(CCX)를 발판삼아 미국 탄소배출권 거래시장 잡기에 나설 것이고 한국, 일본 등 탄소배출권 거래소 설립에 박차를 가하는 아시아 시장 공략도 나설 계획이다.
벌리 사장은 "영국에서 금속이 생산되지 않지만 런던금속거래소가 전세계의 비철금속 가격의 표준이 된 것처럼 이곳의 탄소배출권 가격도 미국, 아시아의 표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yangjae@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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